2016. 12. 2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41)
  본문 : 행 10:3-8 
  제목 :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심.  

 

  “3.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이방인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는 역사적인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그 이방인인 고넬료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먼저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넬료가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다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름대로 구제도 많이 했고 항상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들 중에 그들의 기도나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독 이방인인 고넬료의 기도나 구제만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나 구제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고넬료의 기도나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아울러서 우리의 기도나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될만한 것인지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금년에도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상달된 기도보다는 상달되지 않은 기도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하시고 얼굴을 돌리고 계시는데 내 생각만 자꾸 말씀을 드리니까 상달도 안 되고 응답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좀 더 심중하게 살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본문 3절 말씀에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고넬료를 만나주시는 장면입니다. 고넬료가 이방인으로서 처음으로 특별한 방법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으로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한 방법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라고 했습니다. 아홉시는 지금 우리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를 말합니다. 환상 중에 밝히 본 시간이 오후 세시라고 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한 밤 중에 철야기도를 하다가 아니면 새벽 조용한 시간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환상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몽사몽간에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환한 낮에, 일하는 도중에도 찾아오시고 맑은 정신 가운데서 확실하게 볼 수 있도록 오신다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본 환상이 희미한 가운데 잘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고 정확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천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나 주실 때 천사를 보내서 만나주시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가 있는 곳으로 들어와서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지정하여 찾아오셨고 그를 지명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이미 고넬료를 구원하시려는 일이 계획된 가운데서 그 일을 진행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고넬료가 확실히 천사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 천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고넬료의 육신의 눈으로 확실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의심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의 위엄을 느꼈을 것이며 한 인간이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한다는 것은 정말로 떨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여 무슨 일이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넬료는 늘 기도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즉시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말씀만 하시면 순종할 각오로 살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냐고 말씀을 드리고 순종할 각오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특별히 사자를 보내셨는지가 궁금합니다. 그가 아무리 기도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했다고 해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에 불과한 사람인데 그 사람을 특별히 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의 기도나 구제가 특별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역사적인 일을 고넬료라는 사람을 통하여 진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그를 만나고 계십니다.

 

  그의 기도나 구제도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지정하시고 그가 이런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특별히 사전 계획에 의해서 진행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넬료가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산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삶에 관여하시고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본문 4절에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고 네 구제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제나 좋은 일을 하지만 특별히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있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구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

  고넬료가 어떤 기도를 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넬료 기도의 어떤 면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게 하는 기도였는지 잘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기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 상달된 기도와 상달되지 않은 대표적인 기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하는 기도는 출애굽기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 2:23)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와서 살다가 애굽 사람들의 종으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너무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비록 척박한 땅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땅이었고 하나님만 섬기면서 살 수 있는 땅이었기 때문에 그 땅을 복지라고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애굽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름진 땅이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원했고 야곱 때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뿌리를 내리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온갖 잡신을 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도 못하고 사탄의 종이 되고 애굽 사람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인 줄 깨닫고 하나님께 이 노예생활에서 구원을 해 주시기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좀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산다고 해도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이 귀한 줄 깨닫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되었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과 세웠던 언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 대표적인 예는 예레미야애가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이미 바벨론에게 망하고 비참하게 되었으면서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애3:44-4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행을 보시고 자신을 백성들로부터 가려버리고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망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원해 잘라고 호소를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비참하게 망했고 그 비참함 속에서 살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절하게 바라는 기도를 할 때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참함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죄인지도 모르고 구원을 간절히 바라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상달되지 않는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평가하신일이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선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라고 자랑스럽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받고 돌아갔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기도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기도는 “나는 구속자가 필요합니다.”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인 줄 알지 못하고 알량한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는 기도이고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자신을 구원해 줄 구주가 필요다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넬료의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런 구원을 갈구하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달리야 부대의 장교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감히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육신의 행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고 시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쾌락 속에서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사탄의 소굴인 애굽에 살면서도 육신적으로 잘먹고 잘 살기만을위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거기 사탄이 있든지 죄가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무조건 육신만 평안하면 좋은 줄 알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악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사탄의 종이 되어 살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잘 사는 것처럼 교만하게 삽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탄에게 속아서 죄 가운데서 삽니다.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나의 죄가 흉악함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기도는 많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보다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는 많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에게는 구속주가 필요합니다. 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고 해도 목숨까지 바쳐서 순교의 길을 간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진리 안에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 길로 가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대부분은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않고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2)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구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삽니다.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기억이 되는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고넬료가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는데 그 구제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시는 구제였습니다. 그의 구제에 대해서도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구제를 했기에 그것이 하나님께서도 기억하시는 구제였는지 잘 모릅니다.

 

  헬라어에서 구제라는 말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엘레에모쉬네(ἐλεμοσύνη)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자비, 동정심, 긍휼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그 마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동정하여 베푼 구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긍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자비를 말합니다. 불쌍히 여길만한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로마인에게 유대인들은 자비를 베풀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억압을 하여 강제로 충성을 하게 해야 할 대상이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줄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셨던 그 사랑으로 구제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구제를 특별히 기억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 권력를 가지고 군림을 하고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라는 권력을 가지고 힘없는 유대인을 괴롭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서로 사랑도 받고 서로 행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 우리를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기억하실만한 특별한 일입니다. 도와줘도 은혜를 갚을 수 없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도와줄만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 악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참된 구제입니다.

 

  또 우리의 구제가 억지로 마지못해서 형식적으로 하는 구제는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기억되지도 못한 구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형식적으로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구제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이 억지로 형식적으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별로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자원해서 기쁨으로 힘껏 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 마지못해서 하는 것은 해봐야 별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기뻐하실만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힘든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진심으로 드리는 감사와 충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저도 가끔은 다른 목사들처럼 충성하면 복 받는다. 충성 안하고 살면 벌 받는다. 라고 가르쳐서 억지로라도 교회에 충성을 하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한해를 마감할 때마다 한해를 맞이할 때마다 그런 설교를 통하여 충성스런 성도가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겁을 먹고 억지로 혹은 세상적인 복을 받아보려고 하는 충성은 하나님께 상달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을 해야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기억이 되는 충성입니다.

 

 

  오늘은 성탄감사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2016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입니다.  한해를 보내면서 올 한해를 어떻게 살았는가를 점검해 보는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고넬료와 같은 삶을 살았는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경건하게 살았는가? 아무렇게나 살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섬겼는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가? 항상 기도하면서 살았는가?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기도했는가? 어려운 이웃을 향해서 손을 내밀면서 살았는가? 우리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기억될 만한 삶을 살았는가?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부족하게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새해에는 더 열심을 내고 하나님께 상달되고 기억될만한 일을 해야 되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기쁜 성탄절입니다. 고넬료에게 나타났던 그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음을 알려준 기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기쁜 날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구원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감사입니다. 구원의 주님이 오신 날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주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 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특별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삶들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새해에는 더욱 보람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렇게 살 각오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뜻 깊은 날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