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5.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51)
  본문 : 행 10:44-46 
  제목 :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4.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금년이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에 관한 이야기를 좀 많이 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개혁주의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래의 모습이 있는데 그 원래의 모습이 변질이 되어서 잘못되었을 때 다시 고쳐서 원래의 모습을 회복시키는 것을 개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교회에서 특별히 우리 고신교단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토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입니다. 다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원래 위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과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원칙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늘 자기중심으로 살려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보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님 가까이 하게 하는 것이 개혁입니다. 우리 인간의 타락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원래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가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것이 개혁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 인간의 사용설명서이고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아서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지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자기가 알고 배우고 경험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멀리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우리는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좋아 보이고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고집을 부리며 내 뜻을 주장하지만 내 생각들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 많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 대다수입니다. 성경은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을 향하라고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습성은 늘 이 세상의 부귀영화나 즐거움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내 생각이 성경에서 나온 것인지 성경 말씀과 같은 방향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성경의 말씀과 다른 방향이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것이 개혁정신입니다.

 

  또 우리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힘을 합하여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도 싫어하고 성경 말씀도 싫어하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를 싫어하게 되고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교회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한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여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힘을 합하여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함께 협력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교회를 멀리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교회로 끌어들여서 힘을 합하는 것이 개혁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사도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와서 교회가 전할 핵심적인 복음을 전하자 거기에 성령님께서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도 성령님께서 임하심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본문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언제 오시는가, 성령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할 때 내려오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특별히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성령님께서 나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셨다고 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오시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위대한 믿음인데 그 위대한 믿음을 바르게 알고 진실 되게 고백하는 데에는 성령님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진실 되게 믿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성령님이 오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성령님이 오심으로 내가 가진 믿음이 바른 믿음임을 확인하게 되고 성령님이 오심으로 내가 바른 믿음을 유지할 수 있고 성령님이 오심으로 내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천국백성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령님께서 오시면 모든 세상 문제들도 다 해결이 됐습니다. 마귀에게 눌렸던 모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귀로 인해 고통당하던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얻고 귀신이 물러나고 그로 인한 병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성령님이 임하시게 할까 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배운 사도행전 8장에서는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안수하면 성령을 받게 하는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다가 저주를 받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언제 임하시고 어떤 사람에게 임하시고 어떻게 할 때 임하시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시는 특별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오시거나 오시지 않거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특별히 우리가 이미 배운 사도행전에만 해도 성령님께서 오시는 것이 다양합니다.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아주 특별한 시기에 특별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후에 성령님은 때로는 기도할 때에 때로는 안수할 때에 오늘 본문 말씀처럼 말씀을 전할 때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이 오시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오신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도록 기도하고 그 일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 것은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원칙이 아니라 성령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는 방법을 따라 오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곳에 오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시작할 때에도 아니고 이 말을 마쳤을 때도 아니고 이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성령님께서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한 ‘이 말’은 무슨 말을 가리킵니까? 베드로사도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초청을 받아서 한 말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기록을 하면서 아주 중요한 핵심을 기록했습니다. 그 핵심이 교회가 전해야 할 핵심적인 복음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화평의 복음을 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재판장으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그 재판 자리에 서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런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성령님께서 임하시다고 했습니다. 이런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곳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셔도 하실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는 일이 우리가 바른 복음을 전하고 듣는 일이 성령님을 임하시게 하고 강하게 역사하시게 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본문 45, 46절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에 왔던 유대교 출신 신자들이 성령님이 내려오심을 보고 놀랐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을 보고 놀랐고 또 하나는 그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만 하나님이 되시고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인들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드디어 그 메시야로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알았기 때문에 당연히 유대인들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자를 보내셔서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베드로가 그 복음을 전하자 성령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내려오심을 유대인들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데 대해서 당연하게 생각을 하지만 사실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시작을 해서 우리들에게까지 왔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런 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터인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선교와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국내전도 해외선교 그리고 복지선교 등을 통해서 바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성령님을 받은 이방인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더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들어보니까 이방인들도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임하실 때 일어났던 것처럼 방언으로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알고 믿게 하시는 것이고 그 바른 믿음이 우리 속에서 성장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님께서 임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그 믿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것도 신비하게 방언으로 말하고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사도가 전한 복음이 바른 복음이라는 것을 확증해주시기 위해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고 그 방언으로 말하게도 하시고 하나님을 높이는 찬송을 하게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방언의 용도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복음 자체에 영광과 존귀를 더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복음을 언어가 다른 세게 모든 민족에게 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로 주신 은사였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였는데 각 나라에서 모은 사람들이 다 자기나라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방언이 세계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를 허락하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방언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큰일을 시작하셨음을 확인해준 것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방언이 없었다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간구원의 큰일을 보여주는 것인지 믿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언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찬양을 하게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노래하고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방언은 이상한 언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확실한 언어로 정확하게 하나님을 높이고 가슴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방언이 이렇게 은사로서 좋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이런 좋은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악용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신 목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방언 그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술사 시몬처럼 돈 주고 그런 은사를 사려고 하고 자기 의를 높이는 일에 사용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방언사용을 꾸짖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칼빈은 이 두 번째 용도가 사람들의 야심으로 말미암아 훼손되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가 지닌 위엄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 받은 방언을 허세와 과시를 위해서 남용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시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거두어 가심으로 더 이상 방언이 악용되고 훼손되는 일이 없게 하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칼빈의 주장이 오늘날 개혁주의자들이 가진 방언에 대한 신학입니다. 방언은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신 은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복음을 확인하는 증표요 복음을 높이기 위해서 주신 은사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이런 용도로 쓰지 않고 개인의 허세와 과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외국어를 잘 해서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이 초대교회의 방언을 대신하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통해서 복음을 가슴 속 깊이 믿고 감동을 받고 감격하며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찬양이 오늘날 방언의 은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사도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을 떼 성령님께서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유대인들에게 임하셨던 성령님께서 똑같이 임하셨습니다. 이방인들도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도 와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알게 해 주셨고 믿음을 가지게 해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굳건하도록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셔서 복음의 존귀함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