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19.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53)
  본문 : 행 11:1-10 
  제목 :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런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그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결정장해 증후군’라는 정신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를 사야 하는데 어떤 차를 사야 할까, 이사를 가야 하는데 어떤 집으로 이사 갈까,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고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정도는 중요한 문제이니까 고민을 할만도 하지만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차를 몰고 나갈 것인가 전철을 타고 갈 것인가 이런 소소한 문제까지도 바로 결정을 하지 못하고 남에게 자문을 구하고 결정을 합니다. 쉽게 결정을 해서 일을 망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어떤 일을 할 때 특별히 신앙에 관한 일을 할 때 우리 스스로 깨닫고 결정을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신앙인은 다 내 뜻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답을 쉽게 보여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야 하나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하나, 교만해야 하나 겸손해야 하나, 도적질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도덕적인 문제는 성경이 확실하게 말씀을 해주기 때문에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어느 학교를 가고 어떤 직업을 가야하는지 이런 문제들은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공부를 하고 직장을 가져야한다는 원칙은 있지만 같은 조건을 가진 것 중에서는 내 스스로 선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어떤 선택이 신앙생활을 하기 좋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까 결정을 하고 그 결정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하고 그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한 일에 대해서는 인간의 생각이나 결정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편에서 평가를 하고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아니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만 합니다.
 
  구원에 관한 문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선택하시고 그 선택받은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도 정하시고 그 방법을 따르게 합니다. 이런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왈가왈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쉽게 따르지 못했습니다. 유대교로서의 구원을 고집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유대교의 원칙들을 지켜야 하고 유대인들만의 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교회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중심으로 한 신약교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이런 고집 때문에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고집을 가진 유대인들의 생각을 고쳐서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구원의 길을 보여주는 여러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고 세례를 베풀어서 기독교인이 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거기에 있던 사도들과 형제들 그리고 할례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이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베드로의 행동을 비난했을 때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배경과 그 과정들을 설명하는 것이 11장 1절에서 1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0장에서 그 과정들을 자세히 살펴보았기 때문에 배경과 과정들은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전반부인 10절까지의 말씀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성도들의 반응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함을 들었더니

 

  본문 1절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라고 했습니다.

  가이사랴에 사는 이방인인 고넬료와 그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게 한 사건의 소문이 예루살렘에까지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이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과 형제들이 베드로가 돌아오자 이방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자초지종을 듣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예언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 예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선민의식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하는 것이 매우 싫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이 백성이 된다고 해도 그냥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유대인으로 귀화를 하고 유대교로 개종을 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을 했지 이방인이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특권들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거나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의 제사를 포기하지 않았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성전의 제사를 통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을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유대교에서 가졌던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계속해서 구약시대 때 행하였던 것들을 행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유대교를 통한 신앙과 신약시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를 통한 신앙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이 기독교의 뿌리가 되고 구약성경이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유대교 자체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우리들에게도 유대인들과 같은 고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따르지 않고 옛날 우리 조상들이 가졌던 유교나 불교나 샤머니즘과 혼합된 것들을 신앙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를 그저 종교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교회에 다니면 마음도 편하고 복도 받고 잘 사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대강 적당히 교회나 왔다갔다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를 때로는 바르게살기 운동본부쯤으로 생각하거나 좋은 일하는 복지단체쯤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냥 구원을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그만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여기저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 외에 다른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유일한 길이고 엄청난 축복의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이라고 외쳤습니다. “오직 믿음”이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오직 믿음”에서 오직이라는 말에는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배제’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배제한다는 것은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제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의로움이나 선행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의 선행이나 의로움도 배제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나 또 일반적인 다른 종교에서 다 같이 주장하는 것은 인간편의 의로움이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라고 하면 모든 종교가 다 공통적으로 이런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도 어떻게 하든지 이런 것들을 포함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의로움이나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믿음이라고 할 때에 이런 인간의 의로움이나 선행은 철저히 배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좋은 일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의로움이나 선행은 하나님을 감동시킬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은 그런 것을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적극적으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오직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일에도 성공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어서 좋은 일도 좀 하고 싶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좀 더 잘 섬기고 좀 더 충성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비웃을 것입니다. 믿는다고 다 되냐? 똑바로 살아야지 이런 말로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럴 때 주눅들지 마시고 담대하게 외치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믿는다. 내가 좋은 일 선한 일만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믿는다. 당당하게 외치시면 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알량한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가소로운 사람들입니다. 교만하여 진리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렇게 비웃을 때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소중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믿음으로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받았음에 대해서 감격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본문 2,3절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사도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만나 사람들을 세 분류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형제들이라고 했고 또 할례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교를 믿다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된 제자들이나 또 주안에 있는 형제들은 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할례자들을 따로 지칭하고 있는 것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할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할례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하나님과 언약의 상징이고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할례파들이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할례를 받은 거룩한 백성인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 가정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에 대해서 비난을 했습니다.
 
  사실 성경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만든 규칙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파들은 함께 식사를 한 것까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런 비난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자신이 고넬료라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보여주시고 지시를 하셔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할례자들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단들 중에서 왜 교회가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교가 기독교로 바뀐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알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모르는 척하고 속이려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개신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런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도 행하고 선한 일도 많이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모르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위대함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것을 강조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할례는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이었습니다. 신약시대는 할례 대신 세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식입니다. 그러나 할례나 신약의 세례라고 해도 그것 자체가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할례나 세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언약의 표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한 지체로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대신해서 새로운 언약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일임을 잊지 마시고 이 귀한 특권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루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들이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라고 외쳤던 종교개혁자들의 외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시고 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