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21)
  본문 : 행 8:25 
  제목 :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단순하게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왔다가 그 임무를 완성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데 돌아갈 때 그냥 돌아가지 않고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은 시시하게 별 볼일 없는 이야기를 아무 의미 없이 그냥 기록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 말씀은 어느 한 구절 의미 없이 기록한 부분은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그 시대나 아니면 다른 어느 시절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도 당시에는 그냥 지나가는 단순한 한 사건의 기록이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아주 귀한 의미를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오늘날 설교가 방향을 잃고 그 힘을 잃고 세상이야기나 듣기 싫은 잔소리로 인식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당시에 사도들이 주의 말씀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하던 그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오늘 본문 말씀에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새”라고 했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성에 와서 주의 말씀을 증언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증언하여 말하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주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냥 말한 것이 아니라 증언하여 말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설교한다는 뜻을 가진 용어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혹은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는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선포할 때 그 선포를 여러 가지 용어로 쓰고 있습니다.

 

  “가르치다”라는 말을 설교라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5장의 산상보훈을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5:2)라고 하셨는데 이 가르치다는 말을 설교에 사용해서 설교를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그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또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선포하다”라는 말을 쓸 때도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눅8:1)라고 하실 때 여기서 “선포하다”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 선포한다는 말은 신하가 왕명을 받고 그 왕명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설교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왕의 신하가 어인이 찍힌 문서를 하나 들고 와서 어명이요 하면 무릎을 꿇고 그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그 어명이 사약을 받는 것이라고 해도 왕이 있는 왕궁을 향해서 절을 하고 그 사약을 받게 하는 것이 어명입니다. 설교는 어명과 같이 어명보다 더 엄격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고 그 어명을 듣는 사람들은 어명에 무조건 순종하는 것입니다.

 

  “권면하다”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4)라고 했는데 여기서 권면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호소하고 설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설교는 진리를 전파하고 그 진리를 따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증언하다”입니다. 본문에서 증언하다는 헬라어로 디아말튀로마이(διαμαρτύρομαι)라는 단어를 썼는데 “증언하다”는 뜻 외에 “엄숙히 확언하다, 경고하다, 엄명하다.”라는 뜻으로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법정에 출두해서 자기가 본 사실을 증인으로서 그대로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말에서 순교자라는 말이 나왔듯이 어떤 일이 있어도 진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사실이 아닐 때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다는 각오로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옛날의 설교는 주로 “선포하다”는 말에 가까운 설교였습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대로 따르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믿음이 좋아서 목사님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하면 아멘으로 받고 그대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목사들이 자기 명령을 하나님의 명령처럼 잘못 전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외쳐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지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설교를 왕의 명령을 선포하듯이 해도 잘 안 들으니까 그것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시작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성경공부가 엄청나게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부흥회도 사경회라고 해서 성경을 공부했고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을 동원하여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을 했습니다.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진리를 잘 알면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잘 할 줄 알았는데 공부를 많이 해도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머리만 잔뜩 커져서 지식만 늘었지 그런 지식이 곧 삶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배워서 성경지식으로 남을 비판하는 일에나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 이단들이 많이 들어와서 엉터리 공부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성경공부가 신앙을 망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많은 이단들이 성경공부 가르쳐준다고 유혹을 해서 성경의 진리가 아닌 자기들의 엉터리 교리로 사람을 세뇌시켜서 이단에 빠지게 만듭니다. 무료성경공부니 하는 단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가르쳐도 안 되니까 이제는 권면하는 설교 설득하는 설교를 합니다. 교리를 가르쳐주고 신앙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설명해주고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호소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남의 호소나 부탁이나 권면이나 이런 것에 잘 동조하지 않습니다. 남의 부탁 다 들어주다가는 내 할 일을 못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못 들어주고 남의 부탁 들어주다가 망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고민이 많습니다. 왕명이라고 선포를 해도 안 되고 진리를 조목조목 가르쳐도 안 되고 부탁을 하고 호소를 해도 안 되니까 이제 특별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듣든지 말든지 듣고 믿든지 말든지 그냥 시간되면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하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듣고 감동 받을 가슴이 있는 사람은 감동을 받고 실천한 손발이 있는 사람은 실천을 하고 이것저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요 그냥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사도들의 설교 형태가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두 사도의 설교 형태는 증거하여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것은 내가 목숨을 걸고 확실하게 증언하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이익을 채우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당신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목숨까지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바칠 것을 각오하면서 하는 말이 시시한 이야기를 해서 되겠습니까? 시시한 이야기 하면서 거기 목숨까지 걸겠습니까? 목숨까지 바치면서 꼭 해야 하는 이야기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확실하고 이 길 밖에 없는 아주 중요한 진리의 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살펴볼 것은 그들이 목숨까지 걸고 증언한 것이 “주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그 주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모든 것을 바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외치느냐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라고 하면 넓은 의미에서 성경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성경 말씀 전체를 다 주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의 말씀이란 그런 넓은 의미에서의 말씀이 아니라 좁은 의미에서 주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경 전체를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 말씀은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들이 증언한 주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이나 여러 제자들에게 또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도 여러 가지 말씀들을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 전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정말로 우리들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말씀을 증언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서 많은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그가 처음 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직접 하신 말씀으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던 시몬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우리가 그런 경험을 했으면 그 이야기가 엄청 자랑스러운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게 오셔서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순종했더니 엄청났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별 것 아닌 줄 알고 잡은 고기도 다 버리고 고기 잡을 배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그였기 때문에 고기 엄청 잡은 그런 이야기를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좋아하는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난 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먹고 사는 문제가 다 해결이 되니까 다른 것 할 필요도 없고 오직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만사가 다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영생에 관한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하셨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말한 영생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9-40)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구원에 관한 말씀, 영생에 관한 말씀,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에 관한 말씀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해준 주님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많은 설교자들 가운데 이런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자기 삶을 다 바쳐서 자기 목숨을 다 바쳐서 순교하는 각오로 증언하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삶을 위해서 출세를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거짓말을 섞어가면서 설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보도된 글을 보니까 어떤 기독교 학생운동 본부의 대표 목사가 여고생을 농락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또 어떤 유명한 강사 목사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고위 공무원으로 재직했었으나 교통사고 한 다리를 잃고 좌절 속에서 방황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일어났다고 간증을 하고 특강을 하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까 다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학력도 위조고 공무원 했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심지어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것도 거짓으로 탄로 났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정말로 베드로와 요한 같은 주의 말씀을 바로 증언하는 증언자가 그립습니다. 목숨을 걸고 진리를 외치던 순교자의 신앙이 그립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두 사도가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했는데 이 복음은 앞에서 그들이 증언한 주님의 말씀 즉 영원한 생명 영원한 찬국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정말로 기뻤을 것입니다. 그들이 전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시한 것 좀 나누어줘도 마음이 기쁩니다. 먹을 것 조금 나누어 줘도 기쁘고 작은 선물 하나 줘도 기쁩니다. 받는 사람도 기쁘겠지만 주는 사람도 기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도 기뻤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은 복된 소식입니다. 너무나 기쁜 소식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귀한 소식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허무하게 살았는데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율법을 다 지키고 선을 행하고 수준 높은 삶을 살아야 되는 줄 알고 포기하면서 살았는데 아주 간단한 길을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 인 줄 인정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해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높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그 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쁜 소식을 이런 복된 소식을 어찌 전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시간만 있으면 틈만 있으면 만나는 사람마다 전해야 할 복음이 우리가 믿는 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나쁜 사람들이 자기만 천국 가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가르쳐줍니다. 기도해서 응답받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 이런 쓸데없는 것만 잔뜩 이야기 하고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는 감춰 버립니다. 천국 이야기 하면서도 아무나 잘 못 가는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율법도 지켜야 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고 충성도 해야 되고 그래야 가는 것이지 그냥 믿기만 한다고 가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나쁜 사람들이 교회에 잔뜩 모여 있습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전하지 않고 다른 것을 복음이라고 전하고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수종하게 여기지 않는 나쁜 사라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이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누구에게든지 해당이 되는 복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똑똑한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천하보다 더 소중한 생명을 영원토록 가지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혼혈족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보다 더 무시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비천한 사람들에게도 복음은 유효합니다. 그들도 복음을 믿고 따르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마리아인 중에서도 저 산골 촌마을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이 필요합니다. 촌마을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귀한 복음을 산골까지 다니면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너무나 귀하고 중요한 것인 줄 알았기 때문에 세상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도 버리고 목숨이 위태로운지도 알면서도 당당하게 주의 말씀을 이 복음을 증언하며 외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복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이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족에게 우리 이웃에게 세상 끝까지 시골 구석구석까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 우리 광성교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