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2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23)
  본문 : 행 8:32-35 
  제목 :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기독교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올 1880년 1890년의 우리나라는 정말로 비참한 나라였습니다. 선교사들이 기록한 책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지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굶주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에 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중류층 이상의 미국 사람들이 선교사로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간접적으로 잘사는 모습 인간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언덕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멋있는 옷을 입고 고기로 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저렇게 잘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 믿음대로 예수님을 믿고 잘 살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조금 지난 1905년과 1910년은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비극을 가져온 해입니다.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입니다.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를 점령하기 위해서 우리나라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모든 주권을 가져간 협정입니다. 1910년은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해입니다. 한국 사람들을 매수해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스리도록 내어준 비극적인 해입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장악하고 나서 가장 많이 경계하는 대상이 기독교였습니다. 기독교는 이미 상당수의 교인들을 가지고 있었고 미국의 선교사들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 중에는 애국자들이 많아서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저런 구실을 내세워서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위해서 싸우는 단체로 인식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해서 잘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사랑하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정치에 참여하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좋은 일들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을 향해서 가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인 우리 영혼이 잘 되게 하는 것인데 그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제는 종교자유를 인정해서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했지만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유혹해서 교리를 변질시키는 것이 그들의 작정이었습니다. 교회는 하되 교회에 “가미다나(일본의 신을 모시는 제단)”도 걸어놓고 참배를 하면 학교도 운영하고 병원도 운영하고 복지 시설도 운영하게 해 주겠다고 유혹을 합니다. 교회가 영원한 천국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하는 단체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때 우리가 교회를 지킬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켜야 했다고 아쉬워합니다.

 

  한 번 잘못된 교회는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영혼구원보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교회의 시작이 그런 형편에서 시작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형편에 따라서 자기 뜻대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바르게 살고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들여다보면 얼마든지 그런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잘못된 교회관 이런 잘못된 성경관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진 개혁자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발 모르는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빌립이 다가가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해서 엉뚱한 곳으로 교회를 이끌고 가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깨달아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2-34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러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수레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가 읽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과는 조금 어순이나 번역된 단어가 다르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동일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형장에 끌려가고 있었는데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 같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어린 양과 같이 조용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털을 깎아내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하게 있는 어린양과 같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를 키우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양이나 염소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양이나 염소를 많이 키워보지 못해서 잘 이해를 못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를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의 이야기를 하면 아주 쉽게 잘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양은 참 순한 짐승입니다. 특별히 어린 양은 그나마 뭘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지 자기 털을 깎아내는지 잘 모르고 잠잠하게 있는 순한 짐승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순한 양처럼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잠잠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끌려가면서 모진 곤욕을 치렀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제대로 된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세대의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 줄 몰랐기 때문에 그를 그렇게 억울하게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된 이 사람이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르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성경을 읽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구약성경의 예수님의 예언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가장 중요한 장면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약 700년 전의 사람입니다. 700년 후에 일어날 일을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현장에서 보고 기록한 사람처럼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기록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이의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가 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분이 대단한 일을 하시나보다 하고 따라 다녔지만 사람들에게 잡혀가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그것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힘도 없이 반항도 하지 않고 비참하게 죽으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입을 열지 않았다는 말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거나 자신은 죄가 없다고 변명을 하거나 그런 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입만 열면 천군천사들을 명해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죽여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이 그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계획에 순종하기 위해서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도 그런 예수님의 죽음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죽는구나. 자기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지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죄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많이 들어서 알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5-27) 
 
  모세의 글이나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글이나 선지자들의 글 즉 대선지서 소선지서에 나타난 글을 비롯하여 구약 성경의 모든 글이 예수님에 관한 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약성경이 오실 예수님을 예언한 책이라고 하면서도 막상 해석을 할 때는 그렇게 해석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교훈으로 끝이 나지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끔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요 성도가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개서 역사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사람의 생각이 강하게 역사하면 성경에서 복음을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자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알기 원하고 다른 것은 알지 않으려고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이 알고 싶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문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오랜 역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었고 또 살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기록하는 선지자들도 자신이 기록하는 글이 무슨 뜻인지 확실하게 몰랐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고 그것을 교과서로 삼고 살았던 유대인들 중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녔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신비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다 듣는다고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만 성령님께서 역사하는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신비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말하는 것임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용도도 있지만 다른 용도가 이 복음을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35절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빌립이 마침 내시가 읽고 있는 이 글에서 시작을 하여서 예수님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내시가 마침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기 쉬운 본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말씀을 읽고 있으니 얼마나 복음을 전하기 쉽습니까?  만약에 내시가 창세기를 읽고 있었다면 물론 창세기도 결국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책이기 때문에 복음을 설명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참 설명은 해야 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내시가 신명기에 있는 복에 대한 말씀 즉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하는 말씀을 읽고 있었다면 그 복도 잘 알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을 설명하는 것이겠지만 그가 이해하도록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참을 설명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시가 그렇게 많은 책들 중에서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고 이사야의 글 가운데서도 직접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53장을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상하신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쉬운 본문 설명하면 바로 아멘 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본문을 그가 읽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 때문에 자기의 욕심을 채울만한 말씀을 찾아서 읽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말씀을 찾아서 읽고 자기의 뜻대로 해석을 합니다. 그런 자기의 욕심을 가득 찬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발견하지 못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자기 욕심을 채우고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마음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예수님을 가르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본받아야 할 대상이기 전에 예수님은 믿어야 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본을 보이신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편에 서서 그들의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고 철저하게 순종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셨지만 늘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도 겸손하게 살아야 하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죽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으로만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믿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이 없는 모든 행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다 기록하고 나서 그 기록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요한복음의 기록목적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의 기록목적이 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 모든 성경의 기록 목적임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성경 말씀을 읽고도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임하셔서 그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한 우리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믿음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