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0)
  본문 : 행 9:13-16 
  제목 : 택한 나의 그릇이라.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인터스텔라(Interstellar)라는 2014년에 개봉된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완전히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농사는 짓는 것마다 안 되고 먼지바람이 불어와서 사람이 살기가 힘들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멸망해가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우주 공간에 인간들이 이사를 가서 살 곳이 있는지를 탐험하기 위해서 주인공이 우주로 날아갑니다.  우주선 조종사였던 주인공은 똑똑한 딸아이를 지구에 남겨두고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우주선을 타고 미지의 우주로 날아갔습니다.

 

  우주는 우리가 사는 지구와 다른 차원을 가졌습니다. 시간의 흐름도 다르고 중력도 다릅니다. 그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은 없을까,  혹은 지구가 망해가는 원인을 발견해서 다시 살기 좋은 지구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주에 인간이 살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멸망해가고 있는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공식을 풀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미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가 과학자가 된 딸에게 이 공식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어려서부터 늘 아버지가 연구하던 서재의 책꽂이 뒤편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뒤에서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가 딸을 보며 그 공식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좋은 생각을 해 냈습니다. 우주로 갈 때 똑 같은 시계를 두개를 사서 하나는 딸에게 주고 하나는 아버지가 차고 가면서 딸에게 말한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이 시계는 같이 가고 있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시계로 모르스 부호로 공식을 알려주었고 어렸을 때부터 자주 와서 관찰하던 그 서재에 둔 아버지의 시계에서 아버지가 보내준 모르스 부호를 해석해서 지구가 망해가는 원인을 알아내고 해결을 해서 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는 막연한 공상으로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도 어느 정도 일어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양자물리학 분야에서는 이런 시공을 초월하는 과학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도 엄청난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고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보지도 않았고 가끔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것을 보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와 딸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 마치 차원이 다른 세계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는 것처럼 보여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여 멸망을 항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들은 개인적인 종말로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공식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전달 방법이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꿈으로 환상으로 음성으로 빛으로 이런저런 방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 방법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시계를 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 속에 있는 비밀을 깨닫도록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성경 뒤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성경을 읽기만 하면 그 속에 있는 비밀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하셔서 알게 하셔야 그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9장을 통하여 유대교에 열심을 내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변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와 차원이 다른 세상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으로 살고 있는 사울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예수님의 복음을 서계만방에 전할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사울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붙잡아가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 사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빛을 보고 또 음성을 듣고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눈을 뜨게 하시고 사명자로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사울에게 안수를 하여 세우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에 대답을 한 것이 13절 14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가기는 가야 되겠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전화도 없었고 인터넷도 없었고 그저 사람과 사람에 의해서 소문이 퍼지고 정보가 전달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보통으로 유명한 사건이 아니면 잘 모르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 다메섹에 사는 사람들에게 까지 잘 알려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유대교 지도자로소 촉망을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특별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에게 해당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소문이 빨리 전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도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은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할 때 거기 재판관으로 스데반을 사형시키는데 가표를 던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디 그 일 뿐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조건 체포를 하여 감옥에 갇히게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죽임을 당하게 하고 수도 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괴롭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 목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여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가지고 출발을 할 때 이미 그 사실을 안 사람이 다메섹으로 먼저 달려와서 그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런 나쁜 사람인 사울을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괴롭힌 사울을 팍 고꾸라지게 만들어서 앞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버렸으면 잘 된 것이지요. 그냥 그렇게 벌을 받고 살다가 죽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동안 억울하게 당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라도 위로가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앞을 보게 하고 또 그런 사람을 붙잡고 일을 하시겠다고 하니까 아나니아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가끔은 별로 착하지도 않고 별로 배우지도 못하고 별로 재주도 없는 사람을 불러서 쓰시기도 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이 사실은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으면 성질이 나쁘고 마음이 착하면 뭐가 바른지 구별을 못하고 좀 머리가 똑똑하면 욕심이 많고 이것저것 다 좋으면 게으르고 완벽하게 좋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좋은 면을 보고 불러다가 훈련을 시켜서 쓰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은 참 똑똑하고 열심히 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제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교육을 시켜서 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정말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진리를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되어서 세계만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교회에 다니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의 사울처럼 유대교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그것이 율법도 잘 지키고 선한 일도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결국은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일꾼들이 되었지만 사실은 형편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면에 부족하고 어느 것 하나 잘 하는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고쳐서 진리를 바르게 알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 되게 하려고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과연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복음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이렇게 불러서 세우셨는데 아직도 진리도 모르고 뭘 해야 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세월만 보내는 사람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에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나쁜 점을 말씀 드리면서 사울에게 가기를 주저하자 예수님께서 아니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라, 사울은 내가 택한 그릇이다.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들을 미리 예정하시고 미리 선택을 하시고 그 선택 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을 예수님 믿게 하시고 구원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할 사람도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셔서 사용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받기로 예정 된 사람 중에서 일할 사람도 선택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주의 일을 하고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꼭 그렇게 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일만 많이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열심히 일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박해하는 열심이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기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정말로 굉장한 사람입니다. 아무나 택함을 받는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겠지만 아주 특별한 사람만 아주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만 선택을 받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아무 일에나 선택을 받는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겠지만 이렇게 특별한 일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받고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는 일에 선택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후에도 내가 엄청난 노력을 하고 엄청난 공로를 세워야 구원을 얻게 된다면 별로 감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선택을 받았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영광일 것입니다. 이 일은 너무나 보람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나에게도 큰 기쁨이 되는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큰 기쁨을 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말로 해야 할 중요하고 보람된 일입니다.

 

  사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구원을 받기로 예정이 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각각 다르지만 그 모든 일들이 복음을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교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알고 전하는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음의 일꾼입니다. 여러분 하는 일 하나하나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소중한 일이며 이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동네에 동남아 오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은퇴해서 사시는 선교사님 한분이 계십니다. 가끔 만나서 선교에 대한 소식도 듣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데 며칠 전에 만나서 대화를 하는 중에 깜짝 놀랄만한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랑하기 위해서 일제 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그 분 이야기가 일제 때 신사참배를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했고 그로 인해서 교회가 문을 닫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많이 모이게 되었으니까 다행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아차 내가 지금 고신출신 선교사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지 하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이게 하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를 알고 교회를 다니든지 그냥 우상숭배를 하면서 다니든지 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기를 자기는 믿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실 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병이 고쳐지기도 하고 안 고쳐지기도 하는 것처럼 믿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확신을 가지고 이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습니다. 응답을 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 그 기도가 이루어지고 확신이 없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런 뜻으로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 외국에 가서 선교를 했다면 이 사람은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망치고 다니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도 알지 못하고 주의 일을 했다고 하니까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을 선택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이 귀한 일에 선택을 받게 해주십니다. 선택받는 일꾼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는 일입니다.  

 

 

  사울은 예수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많은 계시들을 받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시내로 들어가면 네가 행할 것을 말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시내에 들어가면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를 하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환상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도 보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이런 계시를 통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 살았는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불러서 예수님의 귀한 일꾼으로 삼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자신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부터 하는 일은 옛날 유대교에 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과거에 유대교의 일꾼으로 있을 때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고 큰 소리를 치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이익은 고사하고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그런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왜 예수님을 믿어야 되는지 무엇을 믿어야 되는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계시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께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를 받습니다. 성경 말씀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을 설교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그냥 읽고 그냥 들으면 안 됩니다. 성령님의 감동시켜주심을 통해서 읽고 들어야 합니다. 서론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차원이 다른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기 위해서 성경을 주셨고 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냥 읽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그래서 복 받고 살라는 말씀으로 들리지만 그 말씀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들으면 그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성경을 읽으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을 때 아브라함처럼 순종해서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 잘 살아야지 라고 들립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그 기사를 읽으면 아브라함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이며 그 후손이 받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계시의 말씀 성경을 바로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 말씀 속에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사울처럼 과거에는 하나님께 사람에게 해나 끼치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사울처럼 예수님의 일군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는 일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계시를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복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비록 외로운 길이고 고난을 받는 길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영광스러운 길이고 너무나 보람된 일을 하는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