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1)
  본문 : 행 9:17-19 
  제목 :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지난주에 인터스텔라라는 영화 이야기를 통하여 다른 차원에 있는 아버지가 지구에 있는 딸에게 이 세상을 구하는 공식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로 인해서 멸망으로 달려가던 이 세상이 다시 새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처럼 우리와 차원이 다른 세상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때로는 환상으로 꿈으로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달하십니다. 그 전달의 결정체가 성경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구원의 길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의 욕심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의 핵심인 구원의 복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고 그 뜻을 알았다면 그렇게 실천을 해야 합니다. 알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알고 나서 그 아는 것을 따라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마술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냥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천을 통하여 변화되는 삶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자세히 살펴보면 성령 충만을 받고 환상을 본 아나니아와 사울이 어떻게 변해 가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겼고 사울도 세움을 받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본문 17절 말씀에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갑자기 찾아오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실천에 옮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하기는 하지만 그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듣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해쳤는지 또 다메섹으로 오는 것도 예수님 믿는 사람 붙잡아가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생각에는 사울 같은 사람이 장님이 되고 비참하게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나쁜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유대인에게 큰 경종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울을 일으켜 세우라고 하셨고 사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기 위해서 택하신 그릇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을 하기 위해서 일어나 사울이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아”라고 부릅니다. 그냥 사울아라고 부르든지 여보세요 라고 부르든지 그러면 될 것인데 굳이 형제라고 부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형제라고 부른 것은 아나니아가 사울을 정말로 한 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호칭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형제자매 관계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형제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제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의 형제라는 단어는 아델프호스(ἀδελφός)입니다. 이 단어는 델프휘스(δελφύς)에서 나온 단어인데 그 뜻은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한 배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헬라어에서는 한 자궁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다른 것으로 더 이상 가까운 사이요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최대한의 언어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더 친밀한 사이입니다. 한 몸이요 한 몸 안의 각 지체라고 표현할 만큼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뜻을 따라 같은 길을 가는 친밀한 사이 그 무엇으로도 떼놓을 수 없는 사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 자궁을 긍휼이라는 단어와 같이 씁니다. 자궁을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 배로 낳은 자식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배로 낳은 자식이 잘못을 했다고 해서 어찌 미워하고 버리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이보다 더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태어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안수하여”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손을 얹어서 안수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수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 맡겨드릴 때 하는 통상적인 의식이었습니다. 원래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릴 때 짐승에게 안수해서 그 죄를 짐승에게 돌리는 의식이었지만 그 의식을 응용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안수를 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거나 교회의 사역자를 세울 때 사용하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를 하는 것도 성령 충만을 받게 하여 그를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함으로 사울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았고 복음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 육신도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라고 함으로서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사울에 다메섹으로 오다가 만난 그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병을 고치고 성령 충만을 받게 하고 또 일꾼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에 사람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안수를 하고 사람을 고치고 일꾼을 세우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사람의 뜻에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안수를 하니까 병 고침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일꾼으로 세워도 일을 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지도 않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18절 말씀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를 하면서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하나는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라고 했고 또 하나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대로 볼 수 없게 된 사울이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즉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수라는 방법을 통해서 치료를 할 때 ‘즉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안수하는 것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눈이 그냥 아무 탈 없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붙어 있어서 앞을 볼 수 없었고 그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영적인 일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통하여 일을 하십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도 실제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빛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고 눈이 멀어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보게 된 것도 그 보이지 않게 고장 난 눈이 고침을 받아서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세례교인에 한해서만 세웁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적인 일을 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일개 인간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좀 이상한 일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자청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3:15).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겠다고 하니까 거절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을 하시자 허락을 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의를 이루는 것”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 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물론 우리가 받는 세례는 그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유대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충성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례를 통해서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울은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되었고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냥 육신의 눈만 다시 보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다시 본 세상은 그전 세상과 같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보게 된 관점은 다른 관점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제 율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을 정죄하여 짓밟고 내가 올라가려는 그런 눈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모르고 죽어가는 불쌍한 인생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19절 말씀에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안수를 하니까 눈이 고침을 받아서 다시 보게 되고 그동안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게 되고 강건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울이 그냥 다시 보게 되었고 그래서 음식을 먹게 되었고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단어 하나하나를 쓰면서 그 속에 있는 깊은 뜻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매.’에서 ‘먹다(람바노, λαμβάνω)’라는 동사는 좀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먹는다고 번역한 것은 오늘 본문뿐입니다. 주로 취하다, 얻다, 받다, 영접하다. 이런 뜻으로 번역을 하는 단어입니다. 먹는다는 뜻을 가진 단어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단어를 쓰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지만 그 음식을 통하여 다른 것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음식을 먹을 때 육신을 위해서 먹었을 것입니다. 육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많이 먹고 맛있게 먹고 즐겁게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먹는 음식은 그렇게 먹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을 취하기 위해서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음식을 먹을 때 배부르면 그만이었고 맛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먹으면 몸에 좋은 것인가 몸을 병들게 하는 것인가를 따져서 먹습니다. 아무렇게나 먹으면 금방 병들게 되고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영적인 생명이 건강하고 그런 음식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는 것 때문에 신앙생활과는 별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왜 먹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건강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을 때 그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고 사는 삶을 통하여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 먹고 몸에 좋은 것 먹고 그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상에서 죄 짓는 일만 한다면 그 음식은 썩을 몸을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면 새 생명을 취하는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강건하여지니라”에서 ‘강건’이라는 단어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여기 ‘강건’이라는 단어는 다른 강건이라는 단어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는 직역을 하면 “힘 안에 거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자기의 힘이 아니라 다른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울이 이 세상을 건강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울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닐 때 그는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병을 아마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빛을 보았을 때 눈이 나빠져서 고침을 받은 후에도 완전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하도 고통스러워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고쳐주시지 않은 병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여기서 강건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런 세상적인 육체적인 건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세상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 비록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강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만 의지하면 우리의 능력만 의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만 보니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능력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면 우리도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울이 그동안 잘못된 것을 배웠습니다. 잘못된 힘을 키웠고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다 버린 사람입니다. 이제 그에게 세상 적인 힘이 없습니다. 아무런 권력도 아무런 능력도 그에게 이젠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능력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힘으로 그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다시 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세례를 받았고 성령 충만을 받았고 안수를 받아서 일꾼이 되기도 했습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고 그 가는 길도 볼 수 있고 복음의 비밀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많이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늘 생명의 양식을 받아서 강건하여 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