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2)
  본문 : 행 9:19-22 
  제목 :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19.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요즘 여러분은 아주 중요한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유대교가 기독교로 바뀌는 아주 중요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섬기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많이 다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다릅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대신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할례 대신 세례를 행하고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고 구약의 절기 대신 다른 절기들을 지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이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니까 모든 것이 비슷할 줄 알았는데 비슷한 것도 많이 있지만 아주 중요한 핵심은 전혀 다릅니다.

 

  이렇게 유대교와 차이가 나는 기독교를 시작하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신약의 교회가 시작이 되는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을 잘 배우는 것이 신약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을 바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보고 있는 사울의 이야기도 사도행전의 중심적인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유대교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가 예수님을 만나 기독교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서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대표적인 일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울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본문 19-21절 말씀에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즉시’라는 말에 유의를 해야 합니다. 즉시라는 말은 무엇보다 먼저 무엇보다 중요하게라는 뜻입니다. 18절에 아나니아가 안수했을 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졌고 다시 보게 되었고 음식을 먹고 강건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은 사울도 ‘즉시’ 사울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고쳐주시고 일꾼으로 세울 때도 즉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을 고쳐주시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잘못을 깨달았느냐, 회개를 했느냐, 확실한 믿음이 있느냐, 앞으로 변함없이 잘 하겠느냐 이런 것 물어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사울도 주변의 여건이나 형편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하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장래는 보장이 된 일인지, 목숨은 부지할 수 있는 일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저질러 온 잘못을 생각하면,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이런저런 것을 따질 형편이 아닙니다. 사울이 지금 마음이 급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그 무엇보다 급한 일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동안 사울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유대교에서 배운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더 퍼지지 못하게 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두는 일이 아주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알고 나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너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가 박해한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은 정말로 엄청난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빨리 전하지 않으면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아주 흉악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에 마음이 급합니다. 빨리 이 사실을 알리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급한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길 이렇게 쉬운 길이 있다는 것을 빨리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때 이 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지금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은 어떤 상태였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믿다가 붙잡혀서 죽을지도 모르는 예루살렘에서 도망 와서 여기 다메섹에 숨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피난 와서 사는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전도를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쉬쉬하면서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들과 함께 숨어 지내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담대하게 외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들어가서 거기 모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외치는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과는 다른 뜻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심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즉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셨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사울의 말을 들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을 21절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사울이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고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가던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모두 다 없애버리려고 했던 그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으로 온 목적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려고 온 사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대하고 그렇게 핍박하던 예수님의 편에 서서 그것도 가장 치욕적으로 생각했던 그 말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고 외치는 것이 어디 가당하기나 한 말이냐는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하나님나라에 변화된 모습으로 계실 때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을 만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사울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메섹으로 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가 처음 만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사울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과는 좀 달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그 모습이 변화되었을 때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집고 있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말씀들을 많이 기억을 하고 있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고 살아가는 모습에 은혜를 많이 받고 그 말씀과 그 모습을 좋아하고 따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나라에 계시는 엄청난 모습의 예수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바로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신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기는 아는 사람들입니다. 알기는 알지만 그렇게 확실히 알고 믿거나 그것을 강조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말씀을 하시고 모범적인 삶을 살다가 가신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도덕적인 말씀들을 좋아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산상보훈에 나오는 이런 말씀들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좋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삶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은 믿지 않습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다라 산다고 밀림에 들어가서 흑인들을 치료해주면서 살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그저 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만드신 세상을 세상의 법칙에서 벗어나서 마음대로 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한 최고의 신앙고백을 알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이 고백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믿음의 최고 고백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새사람이 되고 새로운 사명을 받고 나서 즉시로 최우선적으로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전파한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22절에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강건해졌다고 했는데 그 강건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라고 했는데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이 더 강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회당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유대인들이 놀라기만 하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들이 사울의 말을 믿지 않고 반감만 더 강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뒤에 보면 이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사울의 말을 듣고 독기가 올라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저기서 살기가 돋고 날카롭게 째려보는 눈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강하게 외치는 것은 그에게도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힘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악의에 찬 살기에 굴하지 않고 점점 더 강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언했습니다. 그럴 것이다. 그런 것 같다. 이런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이시다고 확실하게 증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영원한 왕조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진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너희들은 그 메시야를 몰라보고 십자가에 죽게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셔서 구원자가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을, 이 엄청난 사실을 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앞서 인용했지만 베드로가 이 고백을 했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 신앙고백 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곳은 교회라는 이름만 가졌지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공원에 가니까 이상한 나무가 있습니다. 열매가 떨어진 것을 보니까 밤도 아닌 것이 도토리도 아닌 것이 이상한 열매 열린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너도밤나무라고 하는 나무였습니다. 너도밤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이야기니까 이야기로만 들으세요)

 

  율곡이라는 사람이 어렸을 때 그 집 앞을 중이 지나가다가 아이를 보고 혀를 차면서 아 이 아이가 제명에 못 죽겠구나 하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놀라서 그 중을 붙잡고 다른 방도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뒷산에다가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면 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죽으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중을 찾아가서 당신이 시키는 대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는데 왜 아이가 죽으려고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가서 진짜 천 그루를 심었는지 확인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심기는 천 그루를 심었는데 그만 두 그루가 말라죽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고 큰 일나구나 하고 있는데 그 옆에 비슷하게 생긴 나무가 나도 밤나무요 하고 끼어들었답니다. 그래도 한 그루가 모자라는데 마침 또 옆에 비슷한 나무가 있어서 너도 밤나무다. 라고 해서 천 그루를 채워서 죽음을 모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 너도 밤나무다.라고 했던 그 나무가 너도밤나무라는 것입니다. 나도 밤나무라고 우긴다고 해서 밤나무가 아닌 것이 밤나무가 되지 않습니다. 너도 밤나무다. 라고 사람들이 인정을 한다고 해서 밤나무가 아닌 것이 밤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이런 비슷한 일이 교회에 일어나는 것 같아서 이런 이야기를 해봅니다. 오늘날 교단이나 교회들이 마치 몇 명을 채우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처럼 숫자놀음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교회도 아닌 것이 나도 교회요 하고 끼어들기도 하고 교회도 아닌 것을 너도 교회라고 인정을 해 주기도 합니다. 참된 신앙인도 아닌 사람이 나도 신앙인이라고 끼어들기도 하고 신앙인도 아닌 사람을 너도 신앙인이라고 끼어주기도 합니다. 어쩌다 한두 사람 끼어 있는 것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한두 사람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 믿음의 고백이 없으면 아무리 수천수만 명이 모이고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것을 교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단체요 친목단체요 복지단체일지 몰라도 교회는 아닙니다.
 
  바울의 증언을 들은 유대인들은 당혹해하고 어리둥절했다고 말합니다.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안 것과 반대되는 사실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니까 무척 당황스럽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전파하면 당황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다른 복음이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이 거짓 선생들이 장사꾼들이 자기의 이익을 목적으로 교회 안에 많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교회가 본래의 모습을 떠나서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 혼란스럽게 생각합니다.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을 받고 고민도 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세움을 받고 가장 먼저 가장 핵심적으로 전한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신앙고백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먼저 전하고 가장 핵심적인 것을 그가 사는 전 생애에 걸쳐 변함없이 전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우리를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실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영원한 고백이며 이 고백이 우리가 죽도록 전할 복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