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3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3)
  본문 : 행 9:23-25 
  제목 :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도행전을 통하여 사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와서 새롭게 출발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기독교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부터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이전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통한 구원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교를 통한 구원도 오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구원을 받는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게 행하였든지 오실 메시야를 믿고 기다렸든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구원의 길이 그 시대에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고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시대가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옛 언약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옛 언약을 바라볼 필요가 없이 새로운 언약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시대가 사도행전의 교회를 통해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방법은 서로 병존하거나 그래서 둘 중 하나를 택일하거나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성전이나 제사제도를 완전히 없애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다가 새로운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만 존재하고 기독교에만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시작하셨는데 유대인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기독교를 자기들의 원수로 삼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대관계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울이 대적관계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같은 유대인들이라고 같은 동족이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지난주에 살펴 본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즉 하나님이시라고 전파한 것이고 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라고 그리고 혼란스러워 하더니 이제는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를 하고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여 사울을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안 사울과 사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줄을 내려 성 밖으로 내보내어 탈출을 하게 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왜 유대인들이 사울을 원수로 삼고 죽이려고 했는지 왜 사울은 그렇게 도망을 가야만 했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더니 
 
  본문 23-24절 말씀에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이라고 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라고 했습니다. 여기 여러 날이 며칠 정도를 이야기 하는지 잘 모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때가 회심 후 3년으로 보고 그 3년 동안에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러 날이 며칠 정도가 아니라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친 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꽤 많은 날들을 다메섹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울을 처음부터 죽이려고 했다면 회당에 와서 그런 말을 할 때 붙잡아서 죽이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여러 날들을 그냥 둔 것은 거기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충분히 복음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한두 번 듣고 바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여러 번 듣게 하고 생각할 기회도 주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들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원수가 되어서 그 귀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오히려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를 잘 드리고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안다면 성경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도 알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제사를 드렸다면 그 제사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 죄 대신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잘 알고 지켰다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증언을 해도 믿지 않으려고만 합니다. 그렇게 유대교를 잘 아는 사울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라고 하면 그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한번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을 모셔다가 다시 특강을 듣든지 그 증거들을 보여 달라고 하든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을 해보라고 하든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는 사울을 잡아 죽이려고 공모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울을 죽일 수 있을까하고 모여서 모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만나면 죽이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울이 이때를 회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후11:32-33)라고 했습니다.

 

  이 때 사울을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던 사람들이 유대인들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다메섹의 왕이었던 아레다 왕의 고관들이 함께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로 고발을 했는지 어떻게 왕을 움직였는지 나라의 고관들까지 동원을 해서 사울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그들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 사울을 붙잡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그렇다고 하면 한번 생각을 해 보든지 어떻게 되든지 두고 보든지 그러면 좋을 텐데 왜 그렇게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을 붙잡아 죽이려고 했을까요?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싫어하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는 스스로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싫어하고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천국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더 잘 살고 싶은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별로 반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일을 시작하시면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가나안에서 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눈에 볼 때 가나안 땅은 척박한 땅이기 때문에 자꾸 살기 좋아 보이는 애굽 땅을 바라보면서 애굽에 가서 살려고 합니다. 가나안에는 비가 안 오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비가 안 올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하고 인간들이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안 내리시고 하니까 아예 그런 걱정이 없는 애굽으로 가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지요? 돈 때문에 어려움을 당해서 그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뭘 좀 잘 못하면 그나마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실 것만 같으니까 돈 좀 많이 벌어놓고 그런 걱정 없이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가끔 죄도 지어가면서 마음대로 살아도 돈이 있으니까 걱정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생각한 것도 그런 생각입니다. 그들의 생각대로 흉년을 피해서 애굽으로 갔지만 애굽에 가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애굽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 고생고생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종노릇 하는 유대인들을 탈출시켜서 다시 가나안으로 가서 살게 해 주셨더니 이제는 왕을 세워 달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 보다는 우리들 중에서 누가 왕이 되어서 왕을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왕을 세우고 왕이 있으면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 왕들이 과연 백성들을 섬기면서 정치를 잘 했습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왕 같은 왕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백성보다는 자기 잘 살려고 백성들을 착취하고 또 하나님을 안 섬기고 엉뚱한 우상을 섬기게 해서 나라가 망하게 하고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했습니다.

 

  우리도 대통령 선거 잘 하면 대통령이 우리를 먹여 살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줄을 잘 서서 좋은 인맥을 형성하고 그러면 잘 될 것 같지만 좋을 때뿐이지 여차하면 그들은 우리를 외면합니다. 우리를 이용만 해먹고 이용할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것이 세상입니다.

 

  또 성전을 화려하게 짓겠다고 하나님을 조릅니다. 명분이야 그럴듯합니다.  우리는 좋은 집에서 사는데 하나님께서 천막에 거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었으면 성전에서 정말로 하나님께 참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가지고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9장 45-4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거기서 장사를 하고 이권을 챙기고 사람들을 착취하고 악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성전을 짓겠다고 해놓고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선전을 짓겠다고 해놓고 거기서 장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반대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거부하고 자기들이 세운 성전을 중심으로 이권을 챙기고 하나님 신세 안지고 자기들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고 영원한 천국 보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고 싶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하는 왕이 되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힘 있는 왕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정에서 구원하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서 잘 살게 하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고 예수님 따르다 보면 한 자리 할 것 같아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가롯유다는 그것이 아닌 줄 알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별로 반갑게 여기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기본적인 생각들이 그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잘 살고 출세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별로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교회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척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보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보다 이 세상에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님 믿어 구원도 얻어서 천국에 가고 이 세상에서도 복 받고 잘 살면 얼마나 좋겠냐고 유혹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상존할 수 없습니다. 서로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상극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25절에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제자들이란 사울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 사이에 사울을 따르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고 그 복음을 전한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만 그 중에서 믿고 따르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올 때만 해도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갈 수 있는 공문을 지닌 권세가 막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몇 달 만에 아주 비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국에 수배가 내린 범죄자가 되었고 관원의 눈을 피해서 월담이나 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쁜 짓이나 하고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억울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한 일은 나쁜 짓이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인간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하고 중요한 핵심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말을 했는데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되고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될 일인데 이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킨 대로 했는데 어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말을 했는데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요?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그런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떳떳하게 더 강하게 죽음을 당한다고 해도 더 힘써 복음을 외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잡혀서 죽임을 당할 때가 아닙니다. 이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해야 할 임무가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전에는 비굴함도 참고 고통도 참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 것입니다. 앞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서 탈출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로 시작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통들을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4-27)

 

  광주리 타고 성벽을 내려온 것도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협박을 받고 수고를 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헐벗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이 광주리를 타고 탈출을 한 것은 나가서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날이 기다리고 있지만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탈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가 전하는 복음이 정말로 진실한 하나님의 복음이며 우리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내가 돈 몇 푼 벌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고서라도 전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이신칭의의 진리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진리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진리를 믿는 사람들을 다 죽여 없앤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진리입니다.

 

  루터가 만든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아실 것입니다. 루터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로마 가토록 교회를 향해 이신칭의의 복음을 외치다가 그들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면서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3절은 이렇게 부릅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귀한 진리인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한다고 해도 이 진리는 너무 귀한 것임을 알고 이 진리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육신의 생명까지 다 빼앗긴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