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35)
  본문 : 행 9:28-30 
  제목 :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제가 어떤 한 사람을 잘 아는데 이 분은 인생을 참 헛되게 사시는 분입니다. 평생 사업은 이것저것 많이 하셨는데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본적이 없습니다. 맨날 돈이 안 되는 것만 하고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빚만 집니다.  이사람저사람 많이 만나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용만당하고 사기를 당해서 손해를 봅니다. 주변에 좋은 사람은 없고 나쁘게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아버지 노릇은 안 합니다. 남편은 남편인데 남편 노릇은 안 합니다. 그냥 무책임하게 자리만 지키고 있습니다.

 

  평생 신앙생활 했는데 별로 교회에 충성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저것 직분은 많이 맡았는데 직분만 맡았습니다.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고 참석은 잘 하는데 예배는 드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설교시간에 앉아는 있는데 설교를 귀담아 듣지는 않습니다. 혹 어쩌다가 깨어서 몇 마디 들어도 그것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말로 듣습니다.

 

  자기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단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자기가 부족하고 못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야 뭘 배우려고 하든지 고치려고 하든지 할 것인데 도무지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자기자랑만 하다가 자기 몸만 생각하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다가 그냥 세월만 보낸 헛된 인생을 삽니다.

 

  우리들 인생이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한두 가지 잘 하는 것이 있지만 대부분은 잘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애를 써 봐도 별로 해놓은 일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결국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우리 인생이 나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그냥 한일 없이 인생을 살다가 죽지만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을 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이런 삶을 산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과 반대의 삶을 살면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함으로 정말로 소중한 많은 열매를 맺게 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8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라고 했습니다.

  사울의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를 하여 성문을 지키자 성벽을 타고 도망 나와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는데 의심을 하고 만나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때 바나바라는 사람이 사울을 사도들에게 인도해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전파하고 증인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인정을 받게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머물게 되었습니다. 
  
  여기 출입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들어가고 나가고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친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출입하였다는 말을 친밀한 교제로 쓰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한편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쫒기고 로마 당국에도 쫒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복음을 전하다가 발견이 되면 즉시 체포되어 감옥에 가야하고 끝까지 예수님 믿겠다고 고집하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집단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집단이었습니다. 세상에 친하게 지낼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찾아 왔을까요?

 

  사울은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길리기아의 다소는 이스라엘이 아닌 지금 터키의 한 항구 도시입니다. 다소라는 도시가 지금은 별 볼일이 없는 도시지만 바울시대 때는 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한 도시였고 다소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로 잘 사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출세를 하려고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더 꿈이 큰 사람은 잘 사는 외국으로 나갔습니다. 다소는 그런 꿈을 가진 사람들이 오려고 하는 도시였습니다. 항구도시라 교통의 중심지이고 무역도 잘 되고 또 학교도 많아서 공부도 할 수 있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원래 똑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도시에서 머리 조금만 굴리면 아주 부자로 성공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살기 좋은 곳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거기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임을 알았고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단순히 돈만 많이 벌어서 부자로 사는 것만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충성 되게 일하는 일꾼이 되어서 보람된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오려고 한 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원래 척박한 땅이라서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되어서 유대인들이 늘 떠나고 싶어 했던 나라입니다. 나라도 로마에 빼앗겨 버려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했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외국으로 도망가서 살기를 원하는 시절이었는데 사울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하여 큰 뜻을 품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이스라엘에 돌아와서 당시 성경과 율법을 제일 잘 가르치는 최고의 유대교 학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유대교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을 했고 상당한 지위에 올랐고 촉망받는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그 때는 그래도 예루살렘의 생활이 만족할만한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온 예루살렘은 옛날의 예루살렘에 아니었습니다. 옛날처럼 유대고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그동안 교제했던 사람들은 이미 원수가 되어서 만나면 잡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위험한 도시로 그것도 자진해서 들어와서 위험한 사람들과 생명의 보장도 없는 곳에서 그들과 왕래하면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알의 말일이 떨어져서 썩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보람된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라고 할 때 그 자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 자리일까요? 다소라는 도시처럼 머리만 좀 쓰면 복을 받아서 잘 살 수 있는 그런 자리일까요? 유대인들이 사는 예루살렘처럼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감투를 쓰고 열심히 일을 하면 지위도 보장이 되고 칭찬도 받고 보람도 있는 그런 자리일까요?

 

  제가 생각할 때 교회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들어갔던 그 예루살렘과 같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처럼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없지만 별로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돈벌이가 되는 곳도 아니고 그냥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목숨을 담보로 하고라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그런 보람된 자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상급이 있는 최고의 보람된 자리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29절 말씀에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도들과 한 편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말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앞서 말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담대하게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스데반이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순교를 당한 곳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누구보다 더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 자신이 그런 일을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겁내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을 했다고 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지역에서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고 헬라의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유대교의 사상을 가지고 사는 히브리파 유대인들과는 좀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헬라의 문화권에서 살면서 헬라어를 사용하고 헬라 사람들의 사고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다른 점을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을 많이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기적에서 찾으려고 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 표적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그 많은 표적을 보았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적은 사람들만 그것도 예수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의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헬라인들은 그런 표적보다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지혜는 인간의 상식이나 철학이나 과학적인 근거들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헬라파 유대인들과 이야기 할 때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라고 했습니다. 상식으로 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뭐라고 설명을 하고 변론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결과는 역시 사울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이해를 하기 때문에 잘 모르는 분야를 이야기 한다고 해고 그 말을 듣고 믿고 따르지는 않습니다.

 

  지식인들도 정말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을 가지고 믿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지식만 가진 사람은 그 지식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의 한계를 알지 못하고 조금 아는 것 가지고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은 자신이 엄청난 죄인 흉악한 죄인임을 먼저 인정해야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당신이 죄인이라고 말하면 싫어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갈 죄인이란 말을 사람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얼마나 듣기가 싫었으면 그런 복음을 전하는 사울을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그만이지 왜 죽이려고 까지 했겠습니까? 그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세상 복만 이야기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오히려 교회에 오기 싫어하기 때문에 좋은 말만하려고 합니다. 복음은 인간들이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경험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만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설명을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고린도전시 1장 18절을 통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멸망을 당할 사람들이 보면 미련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미련한 것으로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경험으로 지식으로 알 수 없는 이 믿음을 가진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다소로 보내니라.
       
  30절에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라고 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니까 그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이 사울을 그의 고향인 다소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도 바울의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고 예루살렘에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고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죽이려고만 했습니다. 

 

  사울이 다소로 간 것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에 의해서이지만 사도행전 22장의 사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행22:17-18)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봤자 그 사람들이 듣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지 말고 떠나라고 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서 그의 고향인 다소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고향인 다소로 가서 거기 얼마나 머물러 있었는지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날들을 계산해 보면 10년 이상을 고향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다소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그냥 집에서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사울이 고향을 떠날 때 유대교 지도자가 되어서 금의환향할 꿈을 가지고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올 때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피해서 왔기 때문에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자기가 받은 사명을 이야기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조용히 세월만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게 하고 믿음에 대해서 더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훈련시키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도 다 때와 장소가 정해져 있습니다. 어떤 때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강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장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지 않을 때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더 강하게 하며 훈련을 시키는 기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완전히 무장한 다음에 이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에서 시작한지 20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지만 그냥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살펴보고 또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면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위대함을 전 세계를 향해서 전파할 때가 오리라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오히려 살해의 위험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복음은 좋은 것이지만 아무 때나 아무 사람에게나 전해서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경험으로 지식으로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이런 귀한 믿음을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