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2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01)
  본문 : 행 7:23-29  
  제목 : 이스라엘 자손을 돌 볼 생각이 나더니.      

 

  “23.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자주 말씀드립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저지른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따라 엄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늙고 병들고 죽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면 원래 우리가 가졌던 영원한 생명을 되찾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되찾아서 영원토록 하나님나라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 가지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가 사는 역사 속에서 그 계획을 실천해 나오셨습니다. 그 역사를 기록한 책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원의 역사책 즉 구속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항상 먼저 약속을 하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약속을 해 주시고 그 약속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가십니다. 큰 구원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지만 미리 작은 약속들을 이행하시면서 큰 구원의 약속을 믿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약속들을 크고 작은 모형들을 만들어서 보여주시면서 그 모형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알게 하시고 그 구원의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예표론(豫表論, typology)이라고 합니다. 예표란 본래 원형에 대한 모형이나 견본 그림자나 윤곽이나 흔적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설명을 하실 때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서 천국과 비슷한 것을 예를 들어 설명을 하시는 것을 비유라고 하는데 이 비유도 예표의 한 부분에 속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모든 부분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무엇을 보여주는 예표에 속한 것이고 그 예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세의 이야기는 특별히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예수님을 많이 닮아 있습니다. 모세를 통한 구원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많이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구약성경을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구약성경이 예표하고 있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모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성경을 읽으면서 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 자기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이야기하는 설교자들이 많아졌습니다. 혹 가끔 해석을 한다고 하면서도 거기서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그 속에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종교를 통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들이 강해서 바른 진리를 말하지 못합니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본문 23-24절에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 40이 되어서야 모세의 마음속에 그의 형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볼 생각에 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그냥 아무렇게나 진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방법도 미리 정하셨지만 그 때도 항상 미리 정하시고 때를 다라서 진행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 모세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17절 말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라는 말씀을 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4:4절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도 미리 정하신 때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 하면 제밀 먼저 떠올리는 말이 “빨리빨리”라고 합니다. 참지를 못하고 조급해하는 습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기도를 해도 빨리빨리 응답을 받아야 하고 문제가 생겨도 빨리빨리 해결을 해야 하고 뭐든지 빨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빨리 해치우고 말 사람처럼 조급하게 하지 마시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도 하나의 지혜입니다.
 
  그 때가 되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으로 갔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살고 있었지만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공주가 모세를 물에서 건졌다고 해서 이름도 그렇게 지었고 양아들로 삼았다는 것을 이야기 했을 것이고 친어머니가 유모가 되어서 젖을 먹였기 때문에 그 출생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동족들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40세가 될 때가 우연의 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를 이야기 하실 때 늘 하나님의 계획하신 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가만히 계시다가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의 동족들을 돌아볼 마음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동족들이 사는 형장을 보면서 자기가 살고 있던 왕궁의 생활과 비교를 해 볼 때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는지를 눈으로 확인을 했습니다.
그 현장에 자기 동족이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원통한 일을 당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정말로 억울하고 정말로 비참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만 참지 못하고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에 파묻어버렸습니다. 왕궁에서 문무를 다 읽힌 모세였기 때문에 간단하게 해치웠습니다.

 

  모세가 자기 동족을 돌보아줄 마음이 생겨서 왕궁에서 나와서 자기 동족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기 동족을 보고 그 원수를 갚아주고 그 동족을 보호해주려고 한 것은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그 억울한 일을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사탄에게 종노릇 하고 죄에 종노릇하고 욕심에 사로잡혀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하면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4)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돌보시느냐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는 그저 티끌에 불과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데 왜 이런 미천한 우리를 돌보아주시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노래했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구원을 노래하면서 이 시를 인용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히2: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천한 우리 인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사는 우리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 은혜를 알고 감격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저 같은 것이 뭐 그리 대단하기에 저를 구원하시려고 이렇게 엄청난 일을 행하셨습니까?
  
  우리는 모세가 자기 동족을 돌아보기 위해서 그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괴롭히는 못된 사람을 쳐 죽이고 원수를 갚아주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라고 하던 다윗의 찬송을 우리도 불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본문 25절 말씀에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의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는 행동으로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자기 동족을 애굽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는 길이 그 길이라고 생각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모세의 그런 행동을 보고 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려는가보구나 하고 모세가 한 일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잘했다고 칭찬을 하고 모세를 따를 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애굽사람이 잘못했으니까 화가 나서 쳐 죽인 것으로 생각을 했지 그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모세가 아직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구원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무참하게 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은 일개 한두 사람 쳐 죽인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과 방법이 아닌 자기 개인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정당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들을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뜻대로 처리합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일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귀를 도로 붙여주시면서 예수님께서 당장 하늘의 천사들을 대동해서 저들을 물리칠 능력이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다 자기의 생각대로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방법도 자기의 생각대로 하고 구원도 자기들 마음대로 정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그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모세 당시의 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그 구원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알지 못했던 그 구원을 우리는 압니다. 타락한 세대가 타락한 교회가 알지 못하는 이 구원을 우리는 알고 따르고 있습니다.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의 위대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본문 26절에서 29절까지를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애굽사람을 쳐 죽인 그 다음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보았더니 그날은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했습니다. 너희들은 형제인데 왜 싸우려고 하느냐 싸우지 말고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애굽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형제에게 당하면 얼마나 서럽겠느냐면서 화해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을 잘 듣고 서로 화해를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따지고 듭니다. 누가 당신을 관리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사람을 죽임같이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하면서 따집니다. 그 말을 듣고 모세가 도망을 한 것을 보니까 이 사람이 어제 사람을 죽인 것을 고발할 태세였던 것 같습니다.

 

  동족 편들어주다가 동족 도와주고 화해시키려고 하다가 살인자로 고발을 당하여 모세 자신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호화로운 삶을 버리고 잠깐 깨달았던 사명도 버리고 멀리 도망을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루아침에 공주의 아들에서 살인자가 되고 호화로운 왕궁의 삶에서 아무도 모르는 땅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입장으로 보면 참 억울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 하려고 하다가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이나 칭찬도 듣지 못하고 오히려 반감을 사게 되고 고발을 당하게 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으니까 정말로 억울합니다.

  옛말에 “검은머리 가진 짐승은 구제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도와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짐승들도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데 검은 머리를 가진 짐승 즉 사람은 은혜를 갚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실 때 인간들은 구원받기를 거절하고 오히려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포가하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구원을 받게 해 주십니다. 

 

  제가 목회를 해 보아도 우리 모두가 보통 사람들 같으면 벌써 포기를 했을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믿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 그것 하나 하기 힘들어하고 예배드리는 것 그것 하나 마음껏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참 어리석고 연약하고 자기 스스로도 마음대로 못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다르십니다. 한번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원을 주기로 예정한 사람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서 구원의 길로 가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관리나 재판장으로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 와서 꾸짖고 벌을 주고 감옥에 가게하고 죽임을 당하게 하는 무서운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보고 돌아봐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이 죄에서 죽음에서 멸망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주가 되십니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가장 고귀한 것을 갖게 해주시는 너무나 좋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이런 행동을 믿음으로 보고 칭찬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라고 했습니다.

 

  위대한 믿음을 가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엄청난 상을 받게 해 주는 귀한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보다 더 귀한 하나님나라의 왕자들입니다. 우리가 누릴 행복은 이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즐거움보다 엄청나게 더 큰 행복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여러 가지 희생과 헌신들은 이 세상의 모든 보화를 다 준다고 해도 살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 귀한 구원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고 괴롭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도 얻어야 하는 너무나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