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07)
  본문 : 행 7:44-50  
  제목 :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44.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지도자들 앞에서 행한 스데반의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서 듣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세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이 설교가 단순히 보통 자주하는 그런 한편의 설교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문제의 진실을 순교를 각오하고 말하는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설교를 마친 후 스데반은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변명을 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으면 돌에 맞아 죽는 그런 비참한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또 우리가 이 설교를 중요하게여기는 이유는 이 설교가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면서 가장 오해가 심한 주제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과 성전을 무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6장 14절에 기록된 대로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온 예수가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 성전을 헐고 모세가 전해준 규례 즉 율법을 고치겠다고 했다는 말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 나쁜 사람을 따르는 너희들을 처벌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시비 거리 중에 성전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을 하셨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유대인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성전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 관한 오해의 문제는 유대교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날 현대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유의해서 잘 들으시고 신앙인이 가져야 할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본문 44절과 45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전의 시작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시작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의 장막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믿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꾸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보신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금귀고리를 거두어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신이라고 섬기고 기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아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해 주시기 위해서 만들라고 하신 것이 이 장막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막에 계신다고 하면 사람들은 또 장막을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장막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장막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서 장막에다가 대고 절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장막을 화려하게 만드시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장막 안에 있는 도구들은 금으로 은으로 귀한 재료를 써서 만들기는 했지만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우리 인간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속들이 생각나게 하는 물건을 만들어 넣어두셨습니다. 언약궤라고 하는 것인데 그 안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기념적인 물건들을 넣어두셨습니다. 그런 중요한 언약이 있는 장막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장막을 대할 때 장막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증거의 장막이 성전이 되고 오늘날 교회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장막을 성전으로 만들면서 그 의미를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성전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하면서도 그 성전이 주는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1)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


  먼저 두 돌 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이 알고 지켜야 할 중요한 핵심계명을 두 돌 판에 써서 주셨습니다. 두 돌 판에 열 가지 계명을 써 주시면서 서론으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돌 판을 보면서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 애굽 땅에서 노예가 되어서 짐승과도 같은 비참한 삶을 살던 우리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너무나 고마우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제 짐승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것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면서 지켜야 할 중요한 핵심을 계명으로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장막에 오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구원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알면 조금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 장막에서 날마다 행하여지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면 나머지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장막에서 날마다 행하여지는 것은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왜 제사를 드려야 했을까요? 십계명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율법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가를 짐승의 피를 흘려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막에서 십계명을 보고 또 피를 흘리는 그 제사를 보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면 교회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기본적인 계명마저도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죄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을 당해야 할 사람이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아론의 싹 난 지팡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아론 집안의 자손인 고라라는 사람이 그를 따르는 250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불만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왜 모세와 아론만이 지도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데 왜 모세와 아론만 지도자가 되어서 우리 위에 군림하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서 광야에서 고생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16:13)라고 하면서 원망을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애굽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반항을 하고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반란을 일으켰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반란에 화를 내시고 엄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250명은 불에 타서 죽게 하셨고 그들의 집과 물건들은 땅을 갈라서 매장을 시켜버렸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염병에 퍼지게 해서 일만 사천 칠백 명이 죽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을 후 이런 일을 기억하고 더시는 그런 불평이나 반역이 없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론을 들어 쓰신다는 증거로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게 하시고 그것을 보관하게 하신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아론의 지팡이를 보관하라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17:10) 오늘날 우리가 이 교회에 와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란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반란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애굽으로 향하는 것이 반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사탄의 소굴이기 때문에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가나안으로 가게 해 주셨는데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탄의 소굴로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반역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반역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 산다고 하면서도 늘 소망은 세상을 향해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론의 지팡이에다가 새 생명의 싹을 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말라비틀어진 지팡이처럼 도저히 다시 살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생명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만나


  만나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물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와서 먹을 것이 없을 때 광야에 들어온 후부터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을 때까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살게 한 것이 만나입니다.

 

  이 만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해서 보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해서 저희들이 배가 고픕니다. 어떻게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먹을 것을 허락해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려서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몸에 밴 것이 그냥 원망이고 불평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준 것에 대해서 불평입니다. 자기들을 노예에서 해방 시켜서 인간답게 살게 하고 더 중요한 일을 하게하시려고 구원을 해 주었는데 그것을 원망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출애굽기 16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2,3)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 때 고기 가마 곁에서 먹고 떡을 배불리 먹었는데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불러내서 굶어죽게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 같은 일들을 통하여 여기까지 왔으면서도 아직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들이 먹고 살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원망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하시고 메추라기 떼를 내려 보내주셔서 고기도 먹게 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에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약식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만나를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비단 이 세상의 육신의 양식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양식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약속이 그 만나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하늘에서 온 만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영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 물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지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우리가 장막에서 죽임을 당하는 짐승들처럼 죄로 인하여 죽임을 받아야 할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내 죄 대신 죽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본문 46,4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은 증거의 장막인데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서 그것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의 장막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기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성전을 건축하여 법궤를 성전에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허락을 하지 않으시고 대신 솔로몬 시대에 와서 건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솔로몬 때에 성전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음 성전 건축을 생각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건축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집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함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그를 위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하나님을 가리키기 보다는 아버지 다윗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좋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하서 7장에 보면 성전건축에 대한 다윗의 청원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로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실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삼하7:5)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인데 그런 하나님이 계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지도 않으시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7)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파 그 누구에게도 왜 성전을 건축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를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너의 몸에서 난 후네 씨를 통하여 왕위를 잇게 하시고 그 나라를 견고하게 유지할 것이고 그 씨 중에 한 자손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말의 뜻을 해석합니다. 다윗은 이 말씀이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허락한 것으로 알았고 모든 준비를 마쳤고 솔로몬은 아버지의 뜻대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전건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워질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은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장막이요 성전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믿음을 고백하고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곳이 높은 산이건 거친 들이건 넓은 곳이건 좁은 곳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붙잡고 있는 그곳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이 증거의 장막을 바로 알지 못해서 자기 마음대로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들이 그와 같이 화려한 교회당을 짓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외쳐지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건물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거기 진정한 예배가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