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108)
  본문 : 행 7:51-53  
  제목 :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의 설교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 사도의 설교 그리고 스데반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 설교와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은 다 비슷합니다. 다 같이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사람의 반응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었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숫자도 3천명 그리고 5천명이라고 기록을 할 정도로 엄청났습니다.

  반대로 스데반이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는 한 사람도 회개를 하거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스데반을 죽여 버린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스데반의 입장에서 보면 참 기분이 나빴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를 하니까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내가 설교를 하니까 삼백 명이나 삼십 명 안 되면 두세 명이라도 설교를 알아듣고 회개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지 어떻게 돌을 맞게 할 수 있느냐고 불평을 했을 뻔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영광스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보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고 당당하게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어떤 차이가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게 했을까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설교를 듣는 대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그래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갈망하는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고 기쁜 소식을 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준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권력을 가진 배부른 사람들이었고 이 세상의 삶에 만족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고 남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유대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강하게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교만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질책을 하는 것입니다.

 

  이 질책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생각할 설교 제목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만 하니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지금 이대로 사는 것이 좋고 세상이 더 좋아 보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못하고 진리는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진짜 은혜는 받지 못하고 재미삼아서 취미삼아서 교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이 곧은 사람들

 

  본문 51절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우리말에서는 주로 교만한 사람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남에게 고개 숙이지 못하고 교만하게 행하는 사람을 목이 곧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강조점이 완고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라는 뜻에 있습니다. 자기 욕심으로 가득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목이 곧다”는 말씀은 모세시대 때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출 32:9) 출애굽 직후에 그들이 시내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출애굽 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이 되어서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십계명을 위시한 여러 율법들을 주시려고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 아래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금송아지를 자기들의 신이라고 섬겼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의 심리를 말씀드렸습니다. 잔소리 하는 신을 싫다는 것입니다. 금송아지처럼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원하는 것만 주면 되는 신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재물을 신으로 섬기려고 했습니다. 척박한 땅 가나안으로 가는 것보다는 살기 좋은 애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고 그들에게 보람된 일을 하게 해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가는 길을 특별히 주셨는데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의 높으신 뜻보다 자기들의 생각을 앞세우고 자기 고집대로 행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정말로 겸손하게 자기 생각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목이 뻣뻣한 사람이라고 꾸짖으실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잔소리로 생각하고 듣기를 싫어합니다. 이런저런 말 하지 말고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고 그냥 복이나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 천국으로 가기 보다는 이 땅에서 잘 살기를 바라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저주하시고 떠나십니다. 교회가 이렇게 목이 뻣뻣하게 될 때 하나님은 외면하시고 떠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일 조심할 것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일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을 곧게 하고 머리를 쳐들면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돈이 많고 권력이 있고 지금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무시합니다.

 

  사람들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은 괜찮습니다. 어차피 쓸데없는 말들이 많으니까 들으나 마나입니다. 그러나 그런 남을 무시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은혜를 받는데 걸림돌이 되는 고약한 것이 되고 맙니다.
   
  목이 곧은 사람은 교만하여 자신을 높이려는 사람은 이런 귀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할례란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그 언약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행한 특별한 의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비교할 때 이 할례를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을 가지고 비교를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지 못한 짐승과도 같은 사람들이고 자기들은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임을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면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으면 그 언약을 바로 듣고 마음에 있어야 할례를 받은 보람이 있는 것인데 그 연약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1)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귀는 다 가지고 있고 그것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꼭 들어야 할 말씀은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온갖 세상의 죄악 된 이야기들은 솔솔 잘 듣는 사람은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나쁜 말은 잘 듣는데 좋은 말은 잘 안 듣는 습성이 있습니다. 나쁜 친구들의 말이나 사기꾼들의 말은 잘 듣는데 부모님의 말씀은 잘 안 듣습니다. 이단들의 말이나 사기꾼 같이 속이는 목사들의 말은 잘 듣는데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으라”라는 말씀을 엄청 자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6:4),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28:23),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으라”(시81:13),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사42:18),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사1:2).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막9:7)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들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13:9),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하도 사람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복을 받을 것인데 사람들은 말씀 듣기를 싫어하니까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진짜 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 듣는 것도 문제이지만 거짓선생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시대 때는 거짓선지자들이 나타나서 돈 좀 주면 축복을 하고 빈손으로 오면 저주를 했습니다.

 

  지금 죄가 하늘까지 쌓여서 회개하지 않으면 곧 멸망을 당할 때인데 괜찮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겠느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그냥 두시겠느냐 안심하라 라고 거짓 평화를 외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설교를 가장 중심부에 놓습니다. 타락한 중세 로마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신부도 잘 모르는 라틴어로 설교를 한다고 조금 하고 예식만 아주 신비스럽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가 아닌 우상숭배 장소로 바뀌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교회에서는 무엇이 교회냐고 할 때 제일 먼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말씀도 아무렇게나 전해지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해석한 말씀 십자가의 복음이 정확하게 선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바르게 선포되는 말씀을 잘 듣는 곳이 교회입니다. 설교는 그냥 기분 좋은 말이면 듣고 듣기 싫으면 안 듣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진리 말씀만 선포되게 하고 그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실천하는 곳에 교회입니다. 설교를 잘못했을 때 그 교회에 속한 영혼들이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가 중요합니다.

 

2) 마음에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듣기는 잘 듣는데 전혀 변함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갈급한 사람은 어쭙잖게 들은 말 한 마디에 인생이 변하는 사람도 있는데 주구장창 좋은 말씀 옳은 말씀만 듣는데도 도무지 변함이 없습니다.

  귀는 듣고 머리는 오케이 하는데 마음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깨닫지도 못하고 실천할 의지도 없습니다. 그저 좋은 말씀으로 머리에 가지고 다닐 뿐 자신의 삶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의 할례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이 그 마음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좋은 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말일 뿐이고 자기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지적해도 자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평가기준을 정하고 살기 때문에 남의 충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진리고 생명의 길이고 그런 것 상관하지 않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자기 이익만 챙기고 삽니다.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들으면서도 무시를 하는 것입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내 생각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해도 내 삶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그대로 삽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도무지 삶이 바꿔지지 않는 것은 정말로 큰 비극입니다. 자신이 똑똑해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될 일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말씀을 잘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삶을 바꾸는 것이 너무나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사람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나 너희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항상 성령을 거스른다고 했습니다.

 

  여기 ‘항상’이라는 말은 ‘끈임 없이’, ‘영원히’, ‘변함없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항상 끈임 없이 영원히 변함없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는데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일은 항상 해야 할 일인데 항상 할 것이 없어서 성령을 거스르는 일을 그렇게 항상 하는 것이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좋은 일은 조금 하다가 금방 때려치우는데 나쁜 일에 빠지면 변함도 없이 점점 더 잘합니다.

 

  성령님을 거스른다는 말은 성령님께 대항한다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항하여 반대로 가고 성령님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생각나게 하시는 일입니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성경말씀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고 반항한 결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딴 이야기만 하는 사람은 성령님을 받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예 대놓고 성령님과 대항을 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성령운동을 한다는 사람들까지도  성령님께 대항을 합니다. 성령님께서 하신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하고자 일으키신 이적에만 관심이 있고 정작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을 잘 모르고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할 마음을 주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시고 천국을 향해서 가게 하십니다. 이 와 반대되는 길을 가르치거나 가는 사람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만 펴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딴 소리를 하고 딴 소리 하는 것을 좋아할까 라고 생각을 자주합니다.

  왜 신학을 엄청나게 많이 공부한 똑똑한 박사님들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거부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을 할까요? 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거부할까요? 기도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고 기적 같은 일들을 이루어 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사도바울은 아주 간단하게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을 줍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2-14)
  
  우리들은 세상의 영 즉 귀신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님의 일들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일이 어리석게 보이고 복음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데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사시지는 않습니까? 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시고 사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