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1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85)

본문 : 행 5:40-42

제목 : 예수, 그 이름을 위하여

 

“40.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람들에게 왜 기독교를 싫어하냐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고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종교란 다 비슷비슷한 것이고 신들도 다 비슷비슷한 것인데 왜 유독 기독교의 하나님만 그렇게 유난스럽냐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는 그들의 말대로 종교이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신을 만들어 섬기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신이시고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신으로 섬기고 그 하나님께서 제시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신이나 다른 구원의 길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신을 인정하고 다른 구원의 길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이교도가 되고 이단이 됩니다. 우리가 마음이 옹졸해서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기 싫어서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강제적으로 사람들을 교회에 오라고 해서 싫다고 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알아서 오도록 하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강제적으로 끌고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쩌다가 한 번 가면 끝까지 끌고 다니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나갔다가 안 나가면 날마다 전화하고 문자 보내고 귀찮게 해서 싫다고 합니다.

 

쉽게 교회를 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탄이 역사를 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교회에 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강제로라도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너무나 귀한 길이기 때문에 오기만 하면 엄청난 것을 받기 때문에 강권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일단 들어온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유혹과 시험이 있기 때문에 그 시험을 이기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목사가 나쁜 짓을 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나쁜 짓을 해서 교회에 가기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에 가보니까 보기 싫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교회에 가기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착한 사람들이 모여서 착한 일을 하는 곳이라고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악한 죄인들이 모여서 스스로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곳입니다.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아직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사는 것에 교회입니다

 

비단 이런 것들뿐이겠습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기독교 하면 싫어하고 예수님 하면 욕을 하고 예수쟁이라고 비웃고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을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고 그 고난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수록 아 우리가 예수님 편에 서 있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지면 됩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님의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싫어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싫어하고 이 세상의 복이나, 이 세상의 윤리도덕을 좋아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진리를 바르게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진리를 잘 알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 알곡이 아닌 가라지가 섞여 있기도 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면 안 됩니다.

 

왜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고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기독교의 복음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한 사람들에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 이유를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본분들을 살펴보면서 그 차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가말리엘 같은 사람들과,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좋아하고 믿을만한 그 무엇이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율법을 따를만한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엄청난 강이 있어서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예수님의 복음을 바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우리 성도들과 창세전에 버림을 받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리를 모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모르고 싫어합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 간에 차이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이름만 나와도 싫어하고,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제일 귀하게 여깁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이런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똑 같습니다. 그저 적당히 교회나 왔다가 갔다가 하고 좋은 일이나 해서 복이나 받아 보려고 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면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틈만 있으면 가 보려고 기웃거리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세상 사람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유일한 길인 예수님의 이름을 통한 구원을 부인하는 더 악한 사람일뿐입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최고로 알고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41과 42절의 말씀을 가지고 “그 이름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

 

본문 4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1)예수 그 이름의 의미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하면서 다른 예수와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라는 이름에 대해서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어주신 이름이고 그 이름의 뜻을 따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뒤에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붙여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가 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했던 기사를 여러 번 보셨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설교를 하면서 너희가 회개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2:3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위력을 조금 보여주기 위해서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던 불구자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을 하여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만들었습니다.(3:6)

 

우리가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비밀을 알고 믿는 길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 안에 얼마나 귀한 것이 있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이 이름을 전한다고 붙잡아가서 재판에 회부하고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이름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 이름으로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적극 반대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4:18) 오늘 본문 40절에도 지난주에 살펴보신 것처럼 사도들을 불러서 채찍질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이름 안에 있는 진리, 구원, 영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 이런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며 그 이름에 모든 것을 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바르게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만 대면 모든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그 이름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될 것입니다. 이 이름 앞에서 감격하며 감사하며 기뻐 뛰며 춤을 출 것이며 이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영광의 찬송을 목이 터지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을 몰라보고 무시하고 믿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이 이름이 영광을 드러낼 때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이를 갈며 후회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속에 있는 진리의 비밀을 너무나도 잘 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엄청난 축복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마다 이렇게 힘차게 그 이름을 찬송하며 그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더 크게 더 높이 더 진실하게 찬송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2) 그 이름을 위해서 능욕을 받는 자

‘능욕’이란 ‘모욕’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남을 업신여겨서 욕보이는 것을 능욕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낮추어보고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거나 몹시 고생스럽게 하는 것을 능욕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이고 너무나 중요한 일이고 엄청난 칭찬을 받아야 할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일을 한다고 칭찬은 받지 못할망정 이렇게 비참한 대우를 받고 채찍질이나 당하고 비웃음이나 당하고 하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몰라보고 비웃고 불이익을 당하게 한다고 해서 포기할 일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더 강하게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핍박이 올수록 불이익을 당할수록 더 힘차게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업신여길수록 예수님의 이름은 더 높아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할수록 예수님의 이름의 가치는 더욱 치솟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핍박을 할수록 우리의 믿음의 진가는 드러나고 더 빛을 발하게 됩니다.

 

세상의 보물들도 희소가치가 있듯이 우리가 가진 믿음도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정말 귀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의 이름의 비밀을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신분을 얻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해병대 다녀오신 분들은 아무나 해병이면 나는 해병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자부심을 가집니다. 아무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면 어중이떠중이 누구나 다 이 길을 갈 수 있다면 우리도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나 갈 수 없는 진리의 길이기 때문에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사람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길이 힘이 든다고 해도 끝까지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함

 

41절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전하는 사도들을 능욕할 때 사도들은 오히려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기뻐할 것이 없어서 능욕을 받는 일을 기뻐한다는 사람은 이 사람들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항의를 하든지 이렇게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이런 일을 하기 싫다고 하든지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능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능욕을 받을 때 자신들의 지위가 더 높아지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능욕을 받아 하찮게 보이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라고 했습니다. 현대어성경에서는 좀 쉽게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욕당할 만큼 가치 있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며”라고 번역했습니다. 능욕을 받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그 능욕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받는 능욕이라면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믿게 된 것만 해도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귀한 자리에 오게 된단 말입니까? 대통령이 부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재벌이 부러운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제일먼저 나를 아시고 나를 선택하셔서 이런 자리에 불러주셨다는 것만 해도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그 이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전하고 그 이름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하고 하는 것은 더 귀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그런 능욕을 당하면 당장 교회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아도 교회에 잘 안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들을 이런 능욕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능욕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복을 받은 것을 자랑합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해서 자녀들이 다 잘 되었어 참 하나님의 은혜야 나는 충성을 많이 해서 복을 받았어. 돈도 많이 벌게 해 주셔서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야. 나는 기도를 해서 불치병을 고쳤어 참 하나님의 은혜야

 

이런 자랑을 하는 사람들은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를 하고 충성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얼마 못가서 신앙의 회의를 느낍니다. 그런 세상의 축복들이 늘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래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은혜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아는 사람은 그 은혜가 이 세상의 축복이 아니며 이 세상의 축복과 바꿀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의 고난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 손해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 희생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괜히 쓸데없이 율법에 얽매이거나 이런저런 전통에 얽매여서 고생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진 믿음이 위대한 것은 사실인데 그 위대한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을 해야 하는데 그 진실한 고백을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진실한 고백은 희생과 헌신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듯이 진실한 믿음의 고백도 희생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사랑을 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듯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주일날 시간을 희생하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내가 가진 재능 물질 이런 것들을 희생하는 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그 희생과 헌신이 클수록 우리의 믿음은 강한 믿음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능욕을 받는 일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수고와 헌신이 클수록 우리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함

 

본문 42절에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채찍을 때리며 능욕을 받게 하며 협박을 했지만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전도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가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만 믿고 우리만 간직하고 우리만 혜택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데 그것은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며 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는지 이 복음을 말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전하는 곳이기 때문에 늘 이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가정에 돌아가서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우리 가족은 너무나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 복음을 더 잘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옛날에 우리 부모님들은 무조건 교회에 가라고만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왜 교회에 가야하는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믿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건성으로 억지로 교회에 다니다가 때가 되면 교회에 다니는 것조차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교회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이 진리의 도를 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이 믿음의 도를 전하는 일이 성도들이 해야 할 가장 귀한 일이며 교회가 해야 할 가장 귀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나만 믿고 나만 좋은 것을 차지하기에 너무나 귀하고 감격스러운 일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진리를 가르쳐 믿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우리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이름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이 이름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이름을 위해서 능욕을 받아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내가 그런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이 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