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92)
  본문 : 행 7:1-4  
  제목 : 이것이 사실이냐.    

  

  “1.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 2.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람들이 과학 문명이 발달을 하고 많은 것들을 보고 경험하고 배우면서 사니까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생각하며 삽니다. 자기가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해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 중에 지극히 제한된 부분만 알 뿐입니다. 그나마도 잘못된 지식 지극히 근시안적인 지식이 많습니다.

 

  잘못된 지식을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원숭이가 눈이 나빠 잘 안 보인다고 하니까 안경을 끼면 잘 보인다고 누가 알려주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원숭이는 안경을 다섯 개를 사다가 하나는 왼 손에 하나는 오른 손에 그리고 양 발에 나머지 하나는 이마에다가 끼고는 그래도 안 보이니까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고 비웃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뭘 잘 모르고 사는 우리 인간을 비웃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것들의 용도를 잘 모르고 쓰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인생길을 가고 있지만 목적지를 모르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야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바르게 안다면 딴 길로 가거나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인데 잘 모르니까 엉뚱한 길로 가다가 되돌아오고 험한 길로 가면서 고생을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사람은 부산이 자기가 가야 할 목적지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부산행 열차나 비행기를 타시면 됩니다.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쫓겨날만한 나쁜 짓만 안하면 부산까지 무사하게 갑니다. 그러나 목적지를 잘 못 알고 광주로 가는 기차나 비행기를 탔다면 그 안에서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고상하게 산다고 해도 그 비행기로 그 기차로는 부산을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가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이 분명하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우리교회에 잘 오셨습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배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그 열차요 비행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은 교회에 와서 좋은 믿음을 가졌으니까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사시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멋있게 사세요. 그러나 삶이 좀 시원치 않더라도 너무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눈치는 좀 하겠지만 그래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가는 데는 이상이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면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부분적으로 자연의 법칙 즉 하나님의 법칙을 발견해서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니 안계시니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안 후에는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확실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철학이나 윤리 도덕들도 바르게 알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따르게 되겠지만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에 성경말씀과 반대되는 것들을 바른 윤리나 지식으로 알고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술,담배가 뭐가 나쁘니 남녀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니 동성 간에 사랑도 괜찮은 것이니 라고들 생각하지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법칙을 온전히 이해를 한다면 이런 것들이 얼마나 우리를 해치는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9-12)

 

  과거에 자신들이 잘 못 알고 있었던 것을 고수하려고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예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달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잘 살펴보면서 우리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요 길과 진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좀 더 알려고 노력을 하시고 설교라도 잘 들으셔서 여러분이 가는 이 길이 얼마나 귀한 길임을 알고 자부심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대제사장이 이르되

 

  본문 1절 말씀에 “대제사장이 이르되 이것이 사실이냐”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이르되”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약간의 어감 차이가 있는 말이지만 우리말에서는 다 “이르되”로 번역을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말한 “이르되”는 질문을 하는 것이고 스데반이 말한 “이르되”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이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장의 질문에 스데반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가지고 대답을 해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은 이렇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는 것에서 시작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고 끝냈기 때문에 교육의 질이 떨어졌는데 요즈음은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의 설교도 일방적으로 목사가 선포를 하고 마치기 때문에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어도 여러분에게 별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듣고만 계시지 말고 그렇다고 설교 시간에 질문이 있다고 손들고 질문을 하면 안 되지만 마음속으로 왜 그런가 하고 질문을 가지고 설교를 듣고 생각을 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대 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질문을 합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스데반을 법정에 세우고 재판장이 되어서 심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냐고 심문을 합니다. 스데반이 그동안 말하고 다녔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실이냐고 질문을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정말로 진실을 알기 원했다면 스데반이 그렇게 말하고 다닌 이유에 대해서 물어봐야 했을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가 합당한지 그동안 자신들이 뭘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조건 자기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고 자신들의 이권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생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증인을 세우고 고발을 했는데 그 고발대로 말하고 다닌 것이 사실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네가 정말로 율법을 고치고 성전을 헐어버린다고 말하고 다녔느냐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율법과 성전이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율법과 성전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을 했고 성전에서의 제사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그것을 무시하는데 대해서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가 있다면 그들이 선민이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그들의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방인이 아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했는지를 잘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시고 왜 율법을 주셨는지 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셨는지를 부분적으로만 알고 완전하게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늘 그들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왜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으로 세우셨습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이런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에게 성전을 주시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까? 이런 질문들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에게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만 가지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만 알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만 알고 억지로 하다가 보니까 그것마저도 형식적인 것이 되고 바르게 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지 않고 의미도 모르고 다닙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닙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심을 하고 뒤를 돌아보고 세상과 적당히 야합을 하고 예배도 드리는 둥 마는 둥하고 살아갑니다. 억지로 어쩔 수 없이 그냥 시간만 보내고 집에 갑니다.

 

  정말로 어리석고 불쌍한 인간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도 모르니까 그렇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음을 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대강 적당히 사는 것은 참 어리석은 사람이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본문 2절 말씀에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심문에 대하여 스데반이 답변을 하는 장면입니다. 2절부터 53절까지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한 스데반의 답변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스데반의 설교라고 부릅니다. 비록 대제사장의 의도 있는 잘못된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개된 역사를 아브라함의 때부터 설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를 통하여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이나 성전에 대해 잘못된 지식들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재판을 하는 대제사장과 참관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여러분 부형들이여”라고 호칭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장을 아버지로 참관하는 사람들을 형님으로 높여서 부르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잡아다가 거짓증인을 세우고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변명을 하지 않고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존경하는 말로 설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자신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같은 동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는지 왜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는지를 바르게 알자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앞서 유대인들이 사람을 매수해서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내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과 같은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유일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시비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을 먼저 말하는 것은 율법과 성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부터 먼저 시작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가 가진 이 귀한 믿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냥 어느 날 누가 만들어서 준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계획을 세우고 연구를 해서 만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을 세우시고 오랜 세월동안 역사 가운데 진행을 하시고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가장 귀한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본문 3-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는가를 먼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데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데반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더 잘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다시 한 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강조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이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원래부터 영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별 볼일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세우셨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셔서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사이의 지역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인데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됩니다. 여기에서 우상을 만드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따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가나안 땅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가나안까지 간 것은 아니고 가다가 하란이라는 지방에 머물러서 한참을 보냈습니다. 하란 역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긴 하지만 지금의 터키에 위치하는 도시였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거기까지 갔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왜 스데반이 이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이나 성전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한 일부이고 거쳐 가는 길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성전이 있기 전에 이미 믿음을 통한 구원을 계획하고 계셨고 추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추진하실 때 철저하게 과거의 삶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이고 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습관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원한 천국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생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것을 철저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새로운 생각 새로운 삶의 법칙을 가질 때에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말씀에서 받을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고향 친척 아비 집에서 떠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칼빈의 말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과 육신의 욕심들에 결별을 고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가 또 성도들이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세상의 행복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훌쩍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쾌락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고 고기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고향도 떠나고 안정된 생활도 버리고 어디로 갈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 나갔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졌고 믿음의 조상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따르면서 엉뚱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교회나 다니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들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이 믿음을 위해서 과감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오직 믿음을 따르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귀한 것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