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99)
  본문 : 행 7:14-16  
  제목 : 거기서 죽고 장사되니라.  

    

  “14.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사람들은 성경에서 성공한 사람들 축복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복을 받았고 어떻게 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살펴보고 그대로 실천을 해서 복을 받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야기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이 실패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약속을 어김으로 실패한 인생의 시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판에서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노아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대항을 하려고 하다가 사방을 흩어지고 언어가 혼잡하게 되는 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많은 사건들 그 사건에 연류 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고 결국은 징계를 받고 벌을 받아 죽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고 언약을 맺어주시지만 인간들은 그 언약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맙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구원과 또 실패의 반복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런 세상에서의 구원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일시적인 구원으로는 타락한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 영원한 천국으로의 구원을 준비하셨고 그 방법도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그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자신들의 조상을 자랑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당신들 조상들이 자랑할 만한 사람들이 못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 조상들을 사랑하셨지만 조상들은 그 사랑을 떠나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도 결국은 죽어서 무덤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장사된 조상들

 

  오늘 본문 14절에서 16절에 이스라엘민족의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그들을 가나안 땅에 장사지냈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지 않고 신약성경만 보고 설교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통하여 구약성경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바로 보는 것 보다는 스데반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해 주시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냥 바로 구약성경의 족장이야기를 들으면 아 그렇게 살다가 죽었구나 하고 말겠지만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 뜻을 바르게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애굽에서 죽은 조상들은 야곱과 그의 자녀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그들의 조상이지만 그들은 이미 가나안 땅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조상은 야곱과 그 아들들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고 그 야곱의 열두 아들 즉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열두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과 그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족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그들의 후손에게 주시고 그들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아지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런 약속을 받았지만 가나안에 머물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왔고 애굽 땅에서 죽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1)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본문 14절에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에서 흉년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온 야곱의 가족이 75명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6장에는 이 숫자를 75인이 아닌 70인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70인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가족의 수가 아니라 대가족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들이 대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대가족의 수인 70명에 맞추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을 기록했는데 야곱 아들들과 손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손녀도 기록을 하고 있고 증손도 기록을 하고 있는데 손녀가 2명 증손이 4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손자들 가운데 증손이 4명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70인을 맞추기 위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증손만 기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70인을 스데반이 75인이라고 한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스데반이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다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당시 헬라파 유대인들이 보았던 헬라어 성경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전 3-3백년 경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했는데 그 성경을 칠십인경이라고 합니다.  그 칠십인경에는 애굽으로 내려간 가족의 수를 75인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번역의 실수인지 빠진 사람들의 숫자를 채워 넣었는지 잘 모르지만 거기에는 75인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은 우리가 아는 대로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일군을 뽑을 때 일곱 명 모두 헬라파 유대인을 뽑았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헬라문화권에서 살았던 그들이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경 번역 성경을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집트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을 75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우리 조상들이 거기에서 죽고
  본문 15절에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우리 조상들이거기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후손들이 다 죽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 앞서 인용한 애굽으로 이주한 최초 75명의 가족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어느 정도 살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야곱의 자녀들도 때가 되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을 기록한 것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죽음을 강조한 것은 어떤 의미를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두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가의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언약을 받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들의 후손이 받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죽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장수를 하거나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처럼 살다가 보통 사람들처럼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약속의 땅이 아닌 이집트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가지 말라고 만류했던 땅인 애굽에서 그들의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3)무덤에 장사 되니라.
  본문 16절에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야곱은 그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헷족속 에브론에게서 산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굴에다가 장사를 했습니다. 요셉은 세월이 엄청 흐른 후 출애굽 해서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 뼈를 본문이 말한 세겜에 옮겨져서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여기 요셉이 묻힌 세겜은 아브라함이 샀던 그 무덤이 아니라 야곱이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샀던 땅입니다.

 

  스데반이 이 두 장소를 혼동했는지 아니면 두 장소를 통합해서 한꺼번에 설명을 하려 했는지 잘 모릅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이런 좀 잘못된 부분을 만나면 얼른 성경이 엉터리라고 주장을 해버립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면 왜 이렇게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부분을 만나면 오히려 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어느 한 두 사람이 쓴 소설이라면 절대 이런 착오를 남겨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맞춰서 소설로 쓰는데 틀린 부분을 왜 남겨두겠습니까? 성경은 소설이 아니라 사실의 기록이기 때문에 때로는 역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를 알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셔서 반드시 고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별 상관이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대로 두셨을 수도 있고 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그 속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창조과학회 박사님들의 강의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과학의 세계에서 이론과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이론은 무엇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고 법칙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원칙을 말합니다. 법칙은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외가 없이 적용이 되는 원칙입니다.

 

  일반 과학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이 법칙에 다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그것은 화학반응의 법칙 위반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셨는데 이것은 질량 보존의 법칙을 위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셨는데 이것은 부력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법칙을 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 법칙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그런 법칙과 관계없이 행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이 다소 오차가 있다는 것을 설명 드렸습니다. 그 오차로 인해 성경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사실의 기록임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사 온 숫자가 다르고 매장지가 다르게 기록이 되었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를 어디에다가 장사를 지냈는지 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뼈를 묻기를 바랐고 그들의 소원대로 애굽이 아닌 가나안에 매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죽으면서 자신을 가나안 땅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고 요셉도 그가 죽으면 출애굽할 때 자신의 뼈를 가나안으로 가져가서 거기에 묻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들이 비록 죽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가슴에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손들도 그 약속대로 세월이 400년이 지난 후에도 그 유언을 잊지 않고 출애굽하면서 그 급박한 상황에도 요셉의 시체를 메고 나와서 광야생활동안 모시고 다니다가 여호수아 시대 때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야 가나안에 장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혈혈단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본토 친척과 살았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으로 왔던 아브라함이 백세 때 낳은 이삭을 통해 야곱을 낳았고 야곱의 열두 아들로 이어지는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쳐서 애굽으로 내려오게 되었고 거기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들은 다 죽었고 다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후손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이 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스데반이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으로 왔고 거기서 죽어서 장사를 지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이야기를 스데반보다 더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헬라파유대인이라서 히브리어를 잘 몰랐을 것이고 그래서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경을 보았기 때문에 틀린 정보를 가지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더 정확하게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왜 이런 자리에서 다시 반복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이 지금 유대인들에게 잡혀 와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그 죄목이 무엇인 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행6:14)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의 죄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 죄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아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어버리겠다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고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입니다. 성전이나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조상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주신 언약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그런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조상들은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기 위해서 그들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그 사실을 빼면 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하는 일은 하나같이 약속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갔다고 지적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나 야곱이 그랬고 또 그 가족들이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믿지 못하고 애굽으로 갔다가 거기서 죽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해 나가십니다. 70여명의 가족이 애굽으로 왔지만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은 장정만 60만 명이 되고 한 민족을 이루고 드디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가나안에서 그들은 왕국을 세우고 그 왕국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조상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조상을 통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을 교훈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통하여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말씀을 하셨지만 또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성경 기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바르게 알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이런 설교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은 타락하여 죽고 멸망을 당할 우리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그냥 죽고 장사지내고 썩고 없어지고 말아야 할 우리들을 그 비참함에서 구워해 주신다는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언약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선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비참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을 따라 살려고만 합니다. 그들처럼 이 땅에서 복을 받고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신령한 복을 사모하지 못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진리를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가족들이 죽어서 장사지낸바 된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죽고 장사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시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죽음 그 너머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마련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 진리를 바로 알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