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5. 1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18)
본문 : 벧전 2:6-8
제목 : 보배로운 모퉁잇돌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구약성경의 선지서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이 인용된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경고의 내용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사1:2-4)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월삭에 모이고 안식일에 모이고 각종 절기 때마다 모이고 모일 때마다 성대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도 하나님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자신이 죄인일줄 알지 못하고 교만하게 고개를 들고 나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집 마당만 더럽힐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서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있는가?
바른 진리를 알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가?
신앙생활을 왜 하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지를 바르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을 해 보면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이사야시대 사람들 못지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정말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인지 의심이 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는 별 관심이 없고 세상적인 축복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돈이나 좀 벌어보고 잘난 척이나 좀 해 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베드로는 구약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바르게 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예수님은 우리 교회의 중심이십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말은 이 말씀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당시의 타락한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당시의 지도자들은 타락한 백성들 때문에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올바른 교육을 하거나 올바른 재판을 하거나 올바른 길로 인도를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조심을 시키기는 하는데 교훈을 하기는 하는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떼어가지고 와서 이것은 조심을 시키는 것인지 교육을 시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조롱이나 하는 것처럼, 갓난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기초 알파벳이나 가르치는 것처럼,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하는 것처럼 그런 말만 하지 정말로 바른 진리를 가르치려고 하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사28:9-10절 인용)

오늘 인용한 16절 바로 앞 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 우리는 거짓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허위 아래에 우리를 숨겼음이라 하는도다”(사28:1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강한 나라인 애굽과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마치 죽음과 동맹을 맺고 지옥과 동맹을 맺은 사람처럼 죽지도 않고 지옥에 가지도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인용한 이 말씀입니다.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서 기초를 삼았다.
그것을 믿는 자는 다급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께서 그 돌이 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교회의 중심이 되게 하신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전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제사제도를 주시고 절기를 주시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위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부분적으로 이해를 하고 알지 못해도 될 아주 작은 것들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가끔 교회 앞에다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붙이기도 하고 성령님의 교회라고 붙이기도 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께서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시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정식 명칭은 예수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중심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믿음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 교회의 십자가가 많다는 것입니다.
시골이든지 도시이든지 빨간 십자가의 불빛이 없는 곳이 없고 도시지역에는 한집 건너 교회임을 알리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십자가는 있는데 교회 안에 십자가의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유혹을 해놓고 다른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교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교회의 중심으로 세우신 분이십니다.
모퉁이 돌 즉 건물을 지을 때 기초로 세우는 돌, 또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돌, 건물의 주인이 누구인자를 알리는 돌 그 모퉁이 돌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기초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하고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과 연결해 주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기초가 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지 아니하고 이 십자가를 믿음의 중심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요 잘난 체하고 살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2.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본문 6절 하반절 말씀에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산 돌이시며,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돌이라고 할 때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다고 하셨고 
건물을 세우는 건축자들에게 버린 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건물을 세우는 건축자들 즉 교회를 세우는 지도자들도 십자가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면서 그 중심이 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버리고 교회를 세우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영업을 하는 주식회사 같은 영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같은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손님이 많이 와야 되고 돈이 많이 들어와야 성공을 했다고 하는 회사처럼 교회도 그렇게 평가가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강조하고 고난의 길을 가자고 하는 교회는 교회처럼 여기지도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작은 교회의 목사가 하는 넋두리나 변명정도로 취급을 하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 있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천국을 향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절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길이 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길이 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중국 신학교에서 강의를 잘 하고 돌아 왔습니다.
신학생들이 열심히 강의도 잘 듣고 찬양도 잘하고 교회의 사역들도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참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학생 중에 한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교회 성도들이 십일조 헌금을 안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습니다.
말라기서에서 분명히 십일조 하면 복 준다고 했으니까 목사는 가르쳐야 하고 성도라면 실천을 해야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듣고 나서 마음이 좀 좋지를 않았습니다.
이제 막 교회를 시작했으면서 벌써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좀 듣기가 좋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교회를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는 헌금을 해야 집세도 주고 관리비도 주고 목회자 생활비도 하고 선교도 하고 구제도 하고 교육도 하고 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런 돈을 모으기 위해서 교회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고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돈 없이 하는 일만 하면 됩니다.

교회가 해야 할 근본 목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제가 그 질문한 전도사님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도사님 성경에 설교할 데가 없어서 말라기까지 가서 설교합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엄청난 것들이 많이 있는데 벌써 거기까지 가셨습니까?
정말로 그 성도 복 받게 하려고 그 설교합니까 아니면 교회 운영비를 위해서 그럽니까?
그런 설교는 천천히 해도 됩니다. 우선 급한 복음을 바르게 전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헌금하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합니다. 

중국교회가 순수하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려고 하지 않고 벌써 돈타령을 한다면 걱정이 됩니다.
한국교회의 타락한 모습부터 배우게 된다면 정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되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좀 부끄러운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보면 우리가 좀 초라하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초라하게 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는 우리가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자랑스럽고 대단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3.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 7-8절 말씀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로운 십자가이고 우리의 신앙의 기본이요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이나 걸려 넘어지는 돌처럼 귀찮은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없었으면 좋겠는데 길 한 복판에 딱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그 돌에 부딪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아주 귀찮은 존재가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십자가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화려한 거물에 화려한 집에 화려한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것입니다.
저 십자가만 없으면 더 잘 먹고 더 잘 살 수 있는데 저 십자가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된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만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터인데.
아 예수님도 믿고 세상에서도 부자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쓸데없는 말씀을 해가지고 부자 되는 것이 좀 쑥스럽게 만드셨을까?
심령이라는 말이 앞에 있으니까 심령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육신은 부자가 되어도 좋다고 하자…….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란 말이 없고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 큰일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이제 주린 자가 복이 있고, 이제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눅 6:24-26)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십자가란 말이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할 것이고 이런 말씀들도 듣기를 싫어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서 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이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만 바라고 살던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이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호화로운 삶을 부끄럽게 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에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바르게 순종하려고만 했다면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아도 이렇게 뚜렷이 보이는 십자가를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보지 못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 길이 싫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그렇게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냥 구경꾼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그냥 주여 주여 부르기만 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시면서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남에게 부딪치게 하고 남을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되지 맙시다. 라고 설교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뜻으로 설교를 할 말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이도 이 본문에서만큼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부딪치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됩시다. 라고 외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과 부딪쳐야 합니까?
누구를 넘어뜨려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넘어뜨려야 합니다. 그들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시고 택하시고 인정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십자가의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우리는 그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고 믿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 길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자랑스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