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1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종합1)
본문 : 요일 1:3-4
제목 : 완전한 사귐 충만한 기쁨.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는 좀 부족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진실함이 있습니다.
목적이 뚜렷하고 방법이 뚜렷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좀 지나면 목적이나 방법이 변질되기 시작을 합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기도 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 자체가 바뀌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처음에 정했던 그 목표대로 바르게 가고 있는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이 그런 의미에서 기록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님께서 강림하심으로 새로운 교회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사도들이 살아 있었고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에 비록 교회가 교리적으로 잘 정리는 되어 있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나 부활을 사모하는 소망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50년 혹 60년이 지나면서 증인들은 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을 하고 초대교회의 멤버들이 다음세대로 바뀌기 시작을 하면서 복음이 변질되기 시작을 하고 믿음이 엉뚱한 데로 흐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복음서를 해석하는 것이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을 하기 시작을 해서 원래의 복음 처음 시작한 그 진리가 바르게 전달이 되지 못하고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전달이 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거기에 아주 질이 좋지 않은 이단들이 끼어들어서 아주 노골적으로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하고 엉뚱한 이론들을 늘어놓음으로 교회를 변질시키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엄연한 사실조차도 그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주 그럴듯하게 자기주장을 설명을 하고 자기들이 가르치는 지식을 깨달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변질을 바르게 잡기 위해서 복음서를 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요한일서의 기록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도 그 때와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십자가의 복음 천국 복음이 바르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거기에 엄청난 불순세력이 등장을 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을 해서 기독교가 원래의 순수한 모습을 많이 상실해버렸습니다.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너무 크고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변질된 사람들이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요한일서는 우리의 본래 모습을 알게 해 주는 참으로 귀한 서신입니다.
그동안 70여차례에 걸쳐서 요한일서를 설교하면서 성경의 기록내용과 우리의 삶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진리와 멀어져 있고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완벽하게 신앙생활은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목적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말씀들을 잊지 마시고 늘 기억하심으로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서 또 우리가 부분적으로 살펴봄으로 전체의 모습을 잘 보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오늘부터 각 장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전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장의 핵심단어는 “사귐”이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가 가진 신앙생활이란 다른 종교에서처럼 신의 명령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나 종으로서의 굴복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들이 서로 사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끼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1.우리가 사겨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한일서 1장에는 우선 우리가 사귐을 가져야 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1:2)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이 보고 만났던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저 잠깐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음으로 허무하게 없어져 버리는 것이 우리가 가진 생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이 영원한 생명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신 분이시고 영원토로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되는 가장 큰 목적은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과 한 몸이 됨으로서 가지가 나무의 생명을 받는 것처럼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가슴 아파 하신 장면은 우리 인간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 하시고 울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병이 들고 늙어서 죽는 원인을 예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그 원인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생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간다는 것을 아시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죄 문제의 해결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시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믿음은 변질이 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다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려 주시던 그 모습을 더 좋아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 일을 흉내를 내면서 사람들에게서 십자가의 복음을 앗아가기 시작을 합니다.
더러는 병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고친다고 큰 소리를 치는 사기꾼들도 생겨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서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가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빛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1:5)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되신다고 할 때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 그 자체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빛이 가지는 특성과 같은 면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시라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생영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빛이 큰 영향을 줍니다.
빛이 생명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이 빛에다가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심으로 이 세상의 생명 있는 모든 만물들이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된 것입니다.

빛이라고 할 때 또 떠오르는 것은 어두운 곳을 밝게 환하게 해 주는 것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이시라고 하실 때 어두운 세상을 밝히러 오신 빛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때에도 태양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태양의 빛으로 밝게 보여 줄 수 없는 영적인 세상은 암흑과 같은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도 그 성경이 주는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어두움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 어두운 영적인 세상을 환하게 비춰 주셔서 우리가 진리를 알고 그 진리 따라 바른 길을 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빛의 성질 중에 또 하나는 따뜻함입니다. 
만약에 태양의 빛이 없다면 물론 생명도 없고 밝게 볼 수도 없지만 또 하나는 추워서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태양에서 나오는 그 따뜻한 열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따뜻한 사랑의 빛으로 비춰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따뜻함으로 대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엄청 어려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따뜻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빛이시라고 할 때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거룩하심이란 죄와 구별되어 너무나 깨끗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을 가리킬 때 어두움의 자식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빛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죄라고는 전혀 없으신 너무나 성결하고 너무나 깨끗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거룩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영원한 생명이 되시고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 두 가지로 하나님을 다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우리가 정말로 사귐을 갖고 싶은 너무나 귀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 성명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과 사겨야 할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

1장에서 하나님과 사귐을 가져야 하는 우리 인간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1:8)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1:10)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러면서도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죄인인데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는 분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사실 진실 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으로 은근히 이정도면 다른 사람보다 내가 양호하다고 생각을 하고 교만하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욥은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시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욥은 의로운 면에 있어서 자신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남에게 피해를 입힌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도 늘 바르게 행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니까 얼마나 형편이 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42:5-6)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직접 뵈옵지 못했을 때의 욥처럼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깨끗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밝은 빛 가운데 비춰 보면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서 우리 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야 할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앙적인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부끄러운 행동을 하기 때문에 항상 숨어서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밤을 좋아하고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밝은 곳을 무서워하고 피합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악과 불의를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따라 악하고 불의하게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며 적대감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은 밝은 빛이시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분이신데 거기에 반해서 우리 인생은 죄 가운데서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는 인생입니다. 

이렇게 상반된 관계가 어떻게 서로 교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차이가 나도 엄청난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이런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교제를 나눌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3.그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면 우리가 서로 사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처럼 어둠가운데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어떻게 빛 가운데서 행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9)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을 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독특하신 치료방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죄의 처리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하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정에서는 죄를 자백하면 큰일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그것이 증거가 되어서 꼼짝없이 정죄함을 받고 그 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잡혀 가면 고문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죄를 자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백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어합니다.
속에서는 그 죄가 곪아 가고 있지만 겉으로는 깨끗한척하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치료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시기 위해서 하시는 최대한의 관용의 조치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사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의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우리가 깨끗함을 받아서 빛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빛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그 사귐인 깊어질수록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는 삶에 충만한 기쁨이 넘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