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성찬예식) 설교 양향모 목사(성찬 02)
본문 : 고전 11:23-26
제목 : 나를 기념하라.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기억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양귀자의 <모순>중에서 -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반대로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음에 받은 상처는 돌에 새긴 것처럼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작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은혜는 물에 새긴 것처럼 금방 잊어버립니다.

사실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시지도 않으시고 우리에게 거저 베푸시는 사랑을 말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그 은혜의 대가를 지불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잊지는 말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한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잊지 않고 감사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도라면 일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 잊는다고 해도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을 한 예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행할 성찬예식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성찬예식을 알려주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기념하라는 말은 '상기시켜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기념식을 하듯이 예식에 중심을 두라는 것이 아니라 이 예식을 행하면서 예식 속에 들어 있는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냥 듣기만 하면 잊어버리니까 귀로 듣기도 하고 눈으로 보기도 하고 입으로 맛을 보기도 하고 가슴에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꼭 기억하도록 꼭 잊지 않도록 해 주신 것이 이 성찬예식입니다.

이 귀한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정말로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에 깊이 각인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말고 기억하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을 기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예식을 제정하면서 말끝마다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념라라는 말씀은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식에 임하면서 주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떡을 먹게 될 것입니다.
이 떡은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몸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이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날 대신 흘려주신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내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려주시고 그 피 값으로 나를 구속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잊지 말고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나에게 주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잊지 말고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많은 성도들이 이 십자가의 복음을 별로 감격해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님들도 별로 강조해서 가르치지 않고 성도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끔 목사님들께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목사님 그것은 기본 아닙니까? 그것을 기본으로 하고 다른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설교를 잘 들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본으로 하고 하는 설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반대되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잘 살펴보면 세상의 축복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반대개념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리들은 대부분 바울사도가 쓴 서신서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세상의 축복을 기원하는 개념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축복들을 뒤로 하고 십자가를 향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바울은 그런 세상의 축복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주는 것이 그의 최대한의 관심사였습니다.

도대체 십자가의 복음이 뭐기에 자기의 목숨보다 더 소중이 여겼는지
도대체 십자가의 복음에 무엇이 있기에 인생도 청춘도 가족도 돈도 명예도 다 배설물처럼 버리고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려고 애를 썼는지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비밀“이라고 한 것은 복음에는 신비한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신비한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안다면 이 십자가의 복음을 뒤로 하고 다른 것을 전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롬1:16)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는 엄청난 다이너마이트보다 더 강한 능력이 있어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돈이 있는 사람이나 돈이 없는 사람이나, 착하게 산 사람이나 강도 같은 삶을 산 사람이나, 그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아무런 공로나 선행이 없는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게 하는 능력이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식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엄청나게 큰 아주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피로세운 새 언약을 기억하라
본문 25절 말씀에 “…….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도덕적인 삶을 살고 양심적인 삶을 살고 선을 행하면서 사는 것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에는 이런 것을 초월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의의 기준을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의 도리를 잘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의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출세만 하고 성공만 하면 의로운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을 잘 하는 것을 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주일 성수 잘하고 헌금 많이 하고 충성하고 이런 것을 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은 그런데 있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으로 의로운 사람이냐 죄인이냐의 기준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새로운 언약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의의 기준을 세워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믿음이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것이 내가 세운 의의 기준이다. 이 믿음만 가지면 무슨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해 주겠다. 누누이 말씀을 하셨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스스로 의롭게 살려고 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양심적으로 법을 지키면서 선한 일을 많이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 알량한 선행으로 인해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십자가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죄를 좀 짓게 되더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 다음에 나오는 27-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성찬예식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보고 이 성찬에 합당한 몸가짐으로 예식에 참여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은 성찬예식에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떳떳하지 못한 일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예식에 참여를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꼭 그렇게만 생각을 할 수 없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주님 앞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떳떳하게 마실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로 착하게 정직하게 바르게 산 사람만 이 예식에 참여하라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한다면 여기 있는 한 사람도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자신이 죄가 없이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떳떳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성찬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흉측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도저히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 아래에서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것임을 믿기 때문에 여기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가 흉악한 죄인임을 살피는 것이 자기성찰입니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기성찰입니다.
내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 예식에 참여할 수 없는 합당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나중에라도 바르게 착하게 살고 난 후에 이 예식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주님의 몸을 분변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피로 세운 새 언약은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고행이나 성행과 관계없이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주시는 새로운 언약이 피로세운 새 언약입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그 죄의 경중은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다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성찬에 초대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죄를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이 성찬에 참례케 하시는 것은 모두가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놀라우신 축복을 맛보시고, 그 은혜와 축복 속에 사시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십자가의 복음을 주님 오실 때까지 전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본문 26절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 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오실 때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념하라'와 연관성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기념하는 행위'는 주님께서 재림할 때까지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초림의 약속이 약 350회 예언되었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재림의 약속 언급이 신약성경 가운데 316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성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믿고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것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교회는 결국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 세상으로 파송됩니다.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해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생명주신 주님을 증거함으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가슴 깊이에 다시 한 번 묵상하면서 그 주님을 세상에 증거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 성도들이 꼭 알고 믿어야 할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엄청난 능력이 들어 있어서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르고 또 담대하게 전하고 외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복음을 말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이 십자가의 복음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그 자랑스러운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목사는 마땅히 외쳐야 할 이 십자가의 복음을 외치지 않고 성도들은 마땅히 믿고 따라야 할 십자가의 복음을 따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스스로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되었지만 오늘날의 성도들은 쇠사슬에 매이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쇠사슬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향한 쾌락을 따르지 않는 것이 쇠사슬입니다.
이 세상의 축복을 따르지 않는 것이 쇠사슬에 매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십자가의 복음에 미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이 복음만을 전하다가 주님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입을 더 크게 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성찬예식을 베푸십니다.

성찬예식의 배경과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항상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