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9. 3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37)
본문 : 요일 3:16
제목 :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최혁목사님이 쓴 "사랑은 모델입니다"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자연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어있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에 의하여 사랑하는 법을 보고 배우고 자란 사람은 그가 보고 배운 대로 사랑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모델이 없는 사람은 즉 사랑하는 것을 보고 배우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부모가 되어도 자녀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랑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일제시대를 지내고 해방직후 혼란한 시대 그리고 육이오 전쟁을 치르면서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냥 굶지 않고 밥이나 먹여 주는 것이 대단한 일이고 큰사랑이었습니다..

요즘 자녀들이 부모님들에게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야 이놈아 내가 너에게 밥을 안 주었느냐 옷을 안 입혔느냐 뭐가 불만이냐 라고 화를 내십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이 밥 주고 옷 준다고 고마워합니까 그런 것은 당연한 것이고 더 깊은 사랑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옛날 부모님들은 배운 게 밥 주고 옷 주고 그런 것 밖에 없으니까 더 이상의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가슴에 품어 주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그런 사랑을 나누어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대로 포기하고 살 것이 아니라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내의 성도들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인 줄 말면서도 막상 그 사랑을 잘 실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기독교의 역사가 짧아서 그 하나님 사랑의 모델이 시원치 않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오랜 세월 보고 배운 불교나 유교나 미신을 섬기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을 하나님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찬물 한 그릇 떠놓고 정성을 다하여 복을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것 고행을 하는 것 의리를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 이런 것들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고 배운 모델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참 너무나 미약합니다.
보고 배운 모델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엉터리 같은 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사랑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사랑을 배워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모델이 무엇인지를 말씀 드리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표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우리가 알고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사랑
오늘 본문 말씀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랑의 모델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한 형제된 우리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의 모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그냥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이런 사랑에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사랑하자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은 하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날 대신 죽어주셨다고 해도 별로 감격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참 은혜가 되는 말씀이고 놀라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1)그가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잘 아십니다.
그는 우리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우주만물의 생사화복을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복을 주시기도 하시고 벌을 주시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분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신 분이셨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그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시고 얼마나 위대하시고 얼마나 능력이 있는 분이신 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하고 비슷하게 생각하고 막 먹으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저 제사나 받으시는 그런 신으로 생각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늘나라에 계시는 하나님을 직접 뵙고는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위대함 그 화려한 모습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만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그저 초라한 인간으로 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나라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그 화려한 빛에 놀라 쓰러지고 그만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위엄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우리를 위하여
그 하나님인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는데 그 대상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말한다 여기 모인 우리도 그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이다라고 만 하면 별 감동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우리가 누구였던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는 놀라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우리가 어떤 상태였습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항하고 반항하던 우리였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진노의 대상이 되어서 영원한 멸망의 길로 달려가고 있던 우리였습니다.

악하고 또 악하고 못나고 또 못나고 내어 놓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들이었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별 볼일도 없었던 우리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같은 것들은 쳐다보지도 않으실 하찮은 인생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풍전등화라고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위태하게 아슬아슬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연약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뭐 대단한 것 같지만 작은 세균 하나 침투해와도 목숨을 잃어야만 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하나 잘못되어도 고통 속에 죽어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작은 이익 앞에서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지 못하고 원통해 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이나 마음이 바뀌는 연약한 인간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3)목숨을 버리심
그 위대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못나고 추하고 별 볼일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의 깊이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의 목숨은 앞서 말한 생명 혹은 영생 즉 영원한 생명과는 좀 다른 말입니다.
본문에서 목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프쉬케(ψυχη)라는 말인데 이 말은 숨을 쉬다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즉 숨을 쉬고 호흡을 하는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 가지셨던 그 육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육신의 모습을 버리신 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있을 때 죄를 지은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교훈은 육신의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뜻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육신의 목숨 밖에 가진 것이 없다면 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을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우리의 생명이 없어진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의 목숨은 버려도 이 육신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걱정을 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육신이 죽음으로 완전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나기 때문에 사실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것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 희생적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더욱 감격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더 신비한 모습으로 부활하시는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목숨을 버려서 신비한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이 육신이 죽는다고 해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육신을 버린다고 해도 다시 산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랫동안 승려로 지내다가 개종해서 목사가 된 분이 계시는데 김성화 목사님이라는 분이 그분입니다. 
그분의 간증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절간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중이 되어서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어떤 나쁜 사건에 연루가 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감옥에서도 불교에 관련된 책만 읽었는데 어떤 간수가 자꾸 성경도 읽어보라고 권해서 호기심에 성경을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7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를 읽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불경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도 구시라 성의 시디림에 한 젊은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죽고 맙니다.
이 과부는 소문을 듣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아들을 살려 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이 때 석가모니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제 마을로 내려가서 상(喪)을 당한 적이 없는 집을 찾아내서 쌀을 조금 얻어 죽을 끓여 그 아이의 입에 넣으면 아이가 살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가 하루종일 동네를 헤매면서 상을 당하지 않은 집을 찾아봤으나 한집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가 또 석가모니를 찾아가서 한집도 상을 당하지 않은 집어 없더라고 말을 했습니다.
이 때 석가모니가 말을 합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사람은 태어나서 반드시 죽으니 숙명으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고 자신도 육신을 버린 후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공자도 어느 날 제자들이 찾아와서 공자님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자 "야 이놈아 이 세상의 일도 잘 모르겠는데 죽은 다음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생에 있습니다.
이 육신은 죽어도 영원히 사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기독교에만 있는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사랑의 선물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우리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사랑 
오늘 본문 말씀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사랑의 모델을 우리가 배워서 우리도 그와 같은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우리도
역시 우리도 라고 했는데 여기 "우리도"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우리를"에서 우리와는 좀 다른 의미입니다.
같은 말이지만 우리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으로서 우리이고 멸망당할 불쌍한 존재로서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죄 사함을 받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난 우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가 이렇게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였지만 이제는 우리도 남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만한 위대한 사람이로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내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쩔쩔매었지만 이제는 남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여유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 사랑을 입음으로 인해서 이렇게 신분이 바뀐 우리도 당연히 예수님처럼 그런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형제를 위하여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할 대상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누구를 말하는지는 지난 시간에 많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배를 타고 천국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좀 바꿔야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새사람이 되었으니까 모든 일에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 보다 못나고 연약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서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면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집사가 장로가 권사가 목사가 그럴 수 있어라고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비록 교회의 성도라고 해도 교회의 직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사실은 다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족함을 서로 채워 주려고 하고 도와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귀한 신분을 가졌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모두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남에게 상처도 주는 허점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몰라보고 멸망으로 달려가는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같이 함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루 이틀 함께 하다가 말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함께 할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마땅하다는 말은 빚을 졌다 의무가 있다 당연히 해야 한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목숨을 버려서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그 빚을 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렇게 사랑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의무라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지로 우리가 그렇게 목숨까지 버려 가면서 사랑을 할 수야 있겠습니까
아무리 이 육신의 목숨은 버려도 다시 산다고 하지만 그렇게 목숨까지 버리면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런 정신으로 사랑을 하자는 것입니다.
목숨까지 버리면서도 사랑해야 하 의무가 있는 우리 형제를 미워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오해를 하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그러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형제들 즉 이 교회를 위해서 내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것 같은 그런 사랑으로 섬기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여기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모델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모델을 보고 배워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목숨을 버려서 사랑을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형제를 즉 교회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교회를 교회의 형제들을 사랑하겠다는 각오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각오로 그런 정신으로 형제들을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