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1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주제3)
본문 : 마 22:37-40
제목 : 이웃을 섬기는 교회 

우리 교회는 율로게오 복지회라는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지(福祉)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로는 복복자(福)와 복지자(祉)를 써서 “행복한 삶“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영어에서는 welfare라는 말을 쓰는데 비슷한 말로 well-being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도 역시 잘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지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좀 더 편하고 안락한 생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행복하게 살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행복하게 편하게 안락한 삶에 미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이 복지입니다.

이웃이란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성경은 우리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도 영위하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들을 잘 살게 해 주는 것이 복지의 목적입니다.

율로게오(ευλογεω)라는 말은 여러분이 자주 들어서 그 뜻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좋은”이라는 뜻과 “말하다”라는 뜻이 합해져서 “좋은 말을 하다, 칭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율로게오를 하나님께서 쓰시면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뜻이 되고, 우리가 서로에게 쓰면 축복한다는 뜻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 이 말을 쓰면 찬양한다는 뜻이 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로게오 복지회라는 말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즉 우리의 이웃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아 행복하게 잘 살게 하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지란 인간의 힘으로 또는 정부의 힘과 돈이 있는 사람들과 뜻이 있는 기업가들의 힘을 빌려서 어려운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돕는 것이라면 우리의 복지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인간 본분의 참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복지란 그저 먹지 못하는 사람 밥을 먹게 해주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는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부에서 어느 정도는 다 먹고 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지는 그저 겨우 먹고 사는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서 인간답게 살게 해 주는 것이 복지입니다.
가난한 삶을 벗어나서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은 공부를 하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복지회가 하는 외형적인 일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일입니다.
공부를 잘 해서 가난의 세습에서 벗어나서 보람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치면 참된 복지가 못됩니다.
공부를 한다고 꼭 출세를 하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살고 출세를 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잘 살고 보람되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 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율로게오 복지회가 하는 일은 이렇게 큰 뜻을 품고 있습니다.
율로게오 복지회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들이 인생으로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금년도 표어와 실천 목표를 주제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금년도 표어를 “말씀과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그 실천 목표를 
1.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원리로 삼는 교회
2.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교회
3.이웃을 섬기는 교회 이렇게 세 가지로 정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이웃을 섬기는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우리 교회는 율로게오 복지회를 통해서 이미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더욱 더 복지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후원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최고의 율법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큰 계명은 우리를 창조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1.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먼저 우리가 사랑을 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대상을 “이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보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때려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이 때 길을 가던 사람들이 다 그냥 지나갔는데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구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는 사람은 강도만난 자를 구원해 준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웃이란 우리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그 필요에 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 사람이 나의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이라고 하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이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 우리가 가까이 하고 있는 사람 우리의 도움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부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를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녀가 어렸을 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부모님이고 부모님이 연로하셨을 때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웃부터 챙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나의 가족들이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서로 도와주고 살라고 지정해 주신 가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준다고 할 때 먼저 자신의 가정부터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준 가정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서 남을 도와주면서 산다는 것은 위선입니다.

자기 아내 사랑하는 것, 자기 남편 사랑하는 것, 자기 자식 사랑하는 것, 자기 부모 사랑하는 것, 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남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도움이 가장 필요한 가족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족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것이 이웃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동센터 프로그램 중에 야간보호 프로그램의 명칭이 “또 하나의 행복한 가정(another sweet home)"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정이 있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런 가족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족에게 받지 못한 도움을 얻게 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 없이 자라는 아이는 참 불쌍한 아이입니다.
부모님이 계셔도 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도 참 불행한 아이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면 가족같이 사랑으로 돌보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2.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교회
사랑의 대상이 이웃이라면 사랑의 방법은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나의 가족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더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남을 사랑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 14: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16:24) 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아 나 자신을 사랑하면 안 되는구나 자기 생명을 사랑해서는 안 되고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도 불교처럼 자기를 학대하고 고행을 하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야 이거 이해하기가 곤란하다 나를 미워해야 한다는데 남을 사랑하기를 내 몸처럼 사랑하라면 다른 사람도 미워해야 하는가. 라는 반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그 문맥에 따라서 뜻이 다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앞에 인용한 말씀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한다." , 혹은 "자기 목숨을 미워한 
다." "자기를 부인한다."라고 했을 때의 <자기>는 하나님을 떠난 자기를 말합니다. 
그 <자기>는 이기적인 자기요, 욕심으로 가득 찬 자기요, 죄 가운데 있는 자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때의 나는 죄 가운데 있는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나> 혹은 <나 자신>, <내 생명> <내 영혼>이 천하보다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 하리요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워해야 할 <자기>가 있고, 사랑해야 할 <자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미워해야 할 자기를 사랑하려 하고, 사랑해야 할 자기를 미워하려고 하기 때문 혼란을 겪는 것입니다. 

미워해야 할 자기를 미워하고, 사랑해야 할 자기를 사랑할 때 우리는 평안 
을 얻을 수 있고, 확신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천하보다 더 소중한 <자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 소중한 사람이 되었을 때 다른 사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범죄 타락하여 무가치한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하여 인간본래의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부터 별 볼일 없는 존재가 아니라 특별한 존재였고 또 지금은 그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서 다시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특별한 나를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을 닮은 위대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우리 성도들을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런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이미 깨끗하게 씻어졌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할 때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때 가장 우선적인 것은 그들도 우리의 변화된 신분으로 변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이 죽어 가는데 그들의 몸이 죄 가운데 있는데 먹을 것이나 좀 주고 세상에서 죄 가운데서 좀 편안하게 사는 법이나 가르쳐 준다면 그것은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앞서 가족을 사랑하자고 할 때도 이 말이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들이 예수님도 믿지 않고 죄 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적인 사랑만 한다면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가족들은 가족을 사랑하라고 하니까 사랑한다는 것이 가족끼리 주일날 놀러가는 것을 가족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족 사랑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타락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왜 하필 가족 사랑을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짓으로 하려고 합니까?
예배드리는 가장 소중한 시간에 외식하러 가고 주일날 여행을 가고 그러면서 아 나는 목사님 말 잘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꼭 사랑하지 말아야 할 자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죄를 짓고 욕심을 부리고 교만한 자기를 사랑합니다.
그런 나는 사랑할 대상의 내가 아니라 부인하고 버려야 할 나입니다.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사랑으로 새로운 신분이 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바른 사랑입니다.
그 바른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이웃사랑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삼는 교회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요 필수이며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계명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기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씀은 성경말씀 전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을 크게 율법서와 선지서로 나눕니다.
물론 그 외에 다르게 분류되는 것도 있습니다만 율법과 선지서 라고 하면 성경전체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강령이라는 말은 일의 근본이 되는 큰 줄거리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는 우선 강령을 세우고 그에 따라 세부 지침을 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당이나 사회단체에서 먼저 이 강령을 제정하고 그에 다라서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규범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따른 세부 방침이 십계명이고 다른 모든 계명들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서나 선지서나 기타 모든 성경의 계명들은 이 이웃사랑의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 이웃사랑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자기교회 사랑에만 정신이 팔려서 성경의 핵심교훈을 행하지 못합니다.
내교회만 중요하게 여기다가 보니까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고 심지어 교회들에게도 지탄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이 이웃사랑만 중요하게 여기고 우선적으로 실천을 했다고 한다면 이렇게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너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 강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고 멀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선진 국가에서는 정치하는 사람이나 단체의 리더를 뽑을 때 심지어 대학교에서 학생을 뽑을 때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정신이 얼마나 있고 그것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이 모든 성경의 강령이요 핵심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 사랑이요
두 번째가 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해 우리 광성교회의 실천 목표 중에 하나가 이웃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우리 주변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원리요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강령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