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0. 3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96)
본문 : 엡 5:21
제목 : 그리스도를 경외함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노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하는 명령의 말입니다.
불을 꺼라, 왜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으면서 켜 놓았니, 뭐하니, 왜 그러니...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젊은 이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노인들의 그런 말을 잔소리라고 생각하여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청소를 하려고 비자루를 들다가도 청소해라 하면 비자루 내던져 버리고 청소를 안 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노인의 특성을 가진 부모님들과 젊은이의 특징을 가진 자녀들이 한 가정에서 산다는 것이 참 힘이 듭니다.
어렸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 밑에서 먹고살아야 하니까 참고 살지만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면 얼른 떠나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효도가 함께 모시고 사는 그 자체가 효도입니다.
제가 부모님 모시고 함께 사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흔하지가 않습니다.
잔소리를 하고 싶은 부모와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 함께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로 떨어져서 사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귀하고 소중하고 뗄래야 뗄 수 없는 참 유일한 관계인데 이런 소중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 이 잔소리와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거나 자식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알면 이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문제는 어느 쪽에서도 양보를 하려고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어른들은 걱정이 되고 꼭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이 날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아무리 듣기 좋고 필요한 말도 명령으로 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타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남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순종하라", "복종하라"라는 말일 것입니다.
부모님 말씀도 듣기 싫어서 따로 사는 사람들인데 교회에 와서까지도 목사가 잔소리를 하고 또 성경 말씀을 들어서 순종하라 복종하라 라고 하면 아주 싫어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복종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립니다.
좋은 말도 듣기 싫어하는 세상인데 복종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걱정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피차 복종하라"라고 했습니다.
왜 피차간에 복종하라고 하셨는지를 잘 살펴보시고 피차간에 복종할 수 있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피차 복종하라
"복종하라"는 말은 "순종하라"는 말 보다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순종하라"라고 번역된 말은 "휘파쿠오(υπακουω)이고 복종이라고 번역된 말은 휘포탓소(υποτασσω)입니다.

순종하라고 번역된 휘파쿠오(υπακουω)는 말씀을 잘 듣고, 귀를 기울이고, 따른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타당성이 있는 말씀을 하면 그 말씀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복종이라는 말은 그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이 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무조건 그 말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휘포탓소(υποτασσω)라는 말은 원래 고대 군대용어라고 합니다.
군대는 상관이 명령을 하면 무조건 그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대 군대에서는 그 명령이 바로 법이었습니다.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것은 전쟁 때에는 바로 사형이었습니다.
군대의 생태로 보아서 이런 명령체계가 서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적군들이 칼을 들고 총을 들고 다가오는데 돌격 앞으로 하면 누가 앞으로 가겠습니까. 
바위 뒤에 바짝 엎드려 있든지 아니면 뒤로 도망을 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에 절대복종이라는 군기가 서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시 체제도 아닌 요즘 같은 자유를 부르짖는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데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해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복종하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이고 참 세상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웃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을 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1)외고집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마다 고집이 다 있지만 특별히 고집이 황소고집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번 자기가 옳다고 우기면 평생을 변하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 때문에 끝까지 우깁니다.

물론 올바른 일에 고집을 굽히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일에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에 교회에 충성을 하는 일에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신념을 굽히지 않고 죽도록 충성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고집이란 그런 바른 일에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일에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고집을 부릴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고집을 부릴 때 내 기분은 좀 일시적으로 좋을지 모르지만 그 고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참 논리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극히 비논리적이고 자기 생각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 주장은 항상 옳고 남의 주장은 항상 마땅치 않게 생각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찾아왔습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 가운데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것을 알면서도 하와의 마음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하느냐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네 주장대로 할 수 있다라고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너무나 좋아져서 자유와 평등이 너무나 넘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하고싶은 대로하고 내 자유를 막을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조금만 불이익을 당하면 데모를 하고 난리가 아닙니다.

내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지식의 일 부분이고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한 몸으로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한 몸 안에 있는 각 지체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12:21-25)라고 했습니다. 

눈이 자기가 하는 일을 내세워서 손을 무시하고 머리가 자기의 위치를 자랑해서 발을 무시한다면 몸이 균형을 잡고 살아갈 수가 없듯이 성도가 서로를 무시하고 입신 여긴다면 교회가 건강한 교회로 성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복종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순종도 아니고 복종하는 것 항복하고 굴복하는 것처럼 힘이 드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게 여기고 나의 고집과 내 생각을 버릴 때 내가 사는 가정 내가 몸담은 직장 내가 다니는 교회가 평안을 누리고 더 힘있게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앞서서 우리가 피차간에 서로 복종해야 될 이유를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그 경외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로간에 복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두려운 마음으로 섬긴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참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두려운 마음이 없이 쉽게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우리에게 잘해 주시고 좋으신 분이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야훼시여,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예수가 어떻고 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참 불경스런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히 우리가 우러러 볼 수도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조심스럽게 두려운 마음으로 섬겨야 할 분입니다.

경외라는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 된 때에 귀한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자라서 한참 재롱을 부릴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외아들인 이삭을 잡아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도 안 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두말도 않고 번제할 준비를 해서 아들을 끌고 산으로 가서 칼을 뽑아 죽이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독자 아들까지 아낌없이 바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시면 거기에 대하여 우리는 항의를 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거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면 서로가 복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은 그 분의 가르치심에 두려운 마음으로 무조건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서로 섬기는 자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들도 이렇게 서로를 섬기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우리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늘 섬기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내세우고 내 고집을 내세워서 군림하는 자세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예수님의 희생정신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는 정도로 끝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서로를 위해서 희생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까짓 복종하는 것쯤이야 쉽게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는 것 내 고집을 버리는 것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너무나 쉬운 일이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3)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제일 우선적인 일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서 그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늘 기억하고 늘 감사하고 늘 보답하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엄청난 것들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고 보답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다 바쳐서 이 한 몸 다 바쳐서 무엇을 해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생각한다면 복종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4)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그 행한 대로의 상급과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아무런 생각없이 내 고집대로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본문의 말씀대로 서로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서로에게 복종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고 제 고집대로 제 생각대로 산 사람의 최후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복종하는 삶을 산 사람이나 자기 하고싶은 대로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나 똑 같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 복종하며 산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급은 우리의 삶에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상급을 따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경외하신다면 마땅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경외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서로 피차간에 복종하면서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기 고집을 버리고 사시기 바랍니다.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업신여기지 말고 서로의 발을 씻기고 서로를 위해서 희생을 하면서 피차간에 복종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