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12. 1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103)
본문 : 엡 6:5-9
제목 : 상전들과 종들에게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악이 존재하는지 왜 사람들은 서로 같지 않고 어떤 사람은 주인으로 어떤 사람은 종으로 차별대우를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런 환경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대처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 즉 종과 주인의관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과거 로마시대의 노예제도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당연하게 적법하게 자리잡고 있던 사회제도였습니다.

당시에 로마가 지배하던 나라에 6천만명의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구의 대략 절반은 노예였다고 합니다.
노예가 받는 대우는 시대에 따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학대가 심한 경우에는 채찍질을 당하기도 하고 낙인이 찍히고 수족이 절단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좋은 대우를 받고 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주인이 노예를 어떻게 대우하는가에 따라서 가족처럼 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예제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그 정신을 따라서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노예제도를 없애야 합니다라고 외치면서 노예제도 타파운동을 벌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라고 하면서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이런 노예제도나 사회의 부조리 같은 것을 없애기 위해서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사회의 부조리나 인간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어떤 제도를 만들고 바르게 잡는 일에는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제도들을 개선하는 것 보다 그 제도 속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제도 자체가 나쁘고 좋고 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세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그 제도 자체만 가지고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도 그 이론대로 되어만 진다면 나쁘지 않은 제도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도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나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사는 사회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떤 제도를 개선하시기보다는 그 제도 속에서 인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들은 다 불완전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바른 생각으로 살면 그나마 서로 평화를 누리면서 살수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울의 관심은 이 세상의 제도를 비판하고 고쳐서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드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이 죄악된 세상에서 인간의 죄악과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살게 하는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런 부조리가 없는 완전한 낙원을 건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즉 바울의 관심은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관심은 이 세상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보다 죄악된 세상에 완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영혼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구원함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쁜 노예제도를 가졌던 로마제국이 복음으로 변화되어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의 조상은 바이킹, 해적입니다. 
이 해적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변하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변화된 후에는 영국 사회가 변화되어 살벌한 해적이 신사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런 노예제도나 종 제도 같은 것은 없어졌습니다.
미국같은 나라는 전쟁을 치르면서 노예해방을 했고 인권이 신장되면서 대부분 노예제도는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노예제도는 아니지만 그와 같은 비슷한 제도가 오늘날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직장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와의 관계입니다.

과거의 노동자들은 종처럼 일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만 받고 언제라도 필요없으면 내보내고 채찍만 없어졌지 노예처럼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노사관계에 사실 기독교인들이 많이 관여를 했습니다.
위장취업도 하고 노조도 만들고 투쟁을 하게 해서 오늘날 노동자들의 권위가 많이 신장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 결과 세상이 좋아졌습니까
대 회사에서 좋은 자리에서 투쟁을 한 당사자들이야 월급도 더 많이 받게 되고 불의한 처분도 받지 않고 떵떵거리면서 살게 되었지만 그와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용자들이 사람을 잘 쓰지 않는 것입니다
웬만하면 자동화 기계로 설비를 하고 외국으로 공장을 옮겨 버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서라도 일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 기회마저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노동운동이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것을 소수의 사람들이 더 많이 가져서 다수의 사람들이 불행해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그렇게 투쟁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처럼 사원들은 회사를 그리스도의 일처럼 자기 일처럼 열심히 정직하게 하고 회사는 사원들을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대했으면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서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5정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사는 삶을 세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혼관계 가족관계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주종관계 즉 노사관관계입니다.


1.종들에게(일군들에게) 
오늘 우리들은 노예는 아닙니다. 노예시대에 살지 않는 다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직장에 가면 위로 상사도 있고 고용주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세 가지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 이 시대에 고용인의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1)상사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되라. 
본문 5절 말씀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두려워하고 떨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상사를 받드는 행동입니다. 상대방을 높이고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사나 고용주에게 높이며 존경하는 마음을 보여 주는데, 겉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더 이런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실제로 우리가 직장생활을 할 때는 얼마나 상사나 고용주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높이고 공경하며, 허리를 굽힙니다. 
그러나 뒤돌아 서면 욕하고 흉보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직장생활을 할 때, 직장의 상사나 고용주를 대할 때 겉으로만 그렇게 높이고 존경할 뿐 아니라 속마음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2)성실히 임하는 태도를 보일 것. 
본문 6절 말씀에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상사나 고용주가 맡겨 준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눈가림으로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보는 데서는 열심히 하지만 안 보면 안 하는 그런 식으로 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의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마음으로 그 일에 충성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 직장인들에게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주당 일하는 시간은 비교적 다른 나라보다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의 생산성에 있어서는 오히려 못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일 하는 시간은 많지만 그 시간 동안 일을 열심히 하지는 안는다는 것입니다.
상사가 볼 때는 열심히 하는 척하지만 보지 않으면 논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직장에서 이렇게 눈가림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보든지 안보든지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3)단 마음으로 일하라. 
본문 7절 말씀에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단 마음'이라는 것은 기쁜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가림으로 일하지는 않지만, 기쁨으로 하지 않고 마지못해서, 억지로 할 수 없어 하는 것과 기쁨으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억지로 사람에게 하지만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하듯 기쁨으로 일해야 합니다. 
일을 하는데 단 마음 즉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사람과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일을 시켜 보면 일을 하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사람은 기계도 잘 고장이 나고 연장도 잘 없어지고 일할 수 없는 핑계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러나 일을 즐겁게 하는 사람은 핑계거리도 없고 결과도 너무나 좋게 나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을 기쁨으로 하면 유익이 됩니다. 
일 안 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 복이고, 일을 하면 몸과 정신에 좋고, 돈을 버니 좋은데 사람들이 일 자체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그러면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사람이 가장 상팔자입니다. 

그러므로 일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내가 무엇이든지 일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을 고용한 사람에게도 보탬이 되고, 사회와 나라에 기여하며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4)행하는 대로 받는다.
본문 8절 말씀에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로 앎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일하면 그것이 내게 돌아옵니다. 
내가 일을 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좋게 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남을 좋게 함으로 결국은 그것이 나를 위해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서 섭섭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에 따른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보상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직장에서 남의 밑에 있는 사람, 고용인의 입장에 사람은 윗사람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눈가림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충성스럽게 일을 하며, 일을 하는 데에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직장에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2.상전들에게 
본문 9절 말씀에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상전들, 고용주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 즉 남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도 이와 같이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종의 신분이나 상전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나 원리는 같다는 것입니다. 
종의 신분에 있는 사람들도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면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상전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똑같이 복종하는 원리 속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위에 있고 주인의 위치에 있으면 나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9절 말씀 뒷부분에 보면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상전이라 해도 그 위에 또 상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상전, 즉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사람의 중심까지 보시는 상전이 계시는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동일하게 복종하는 자세로 다스리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자기 위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지냅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된다든지 통치자가 되면 자기가 제일 위에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롭고 신앙이 있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 위의 진정한 상전을 늘 모시고 삽니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진정한 자기 위의 상전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 진정한 성령충만입니다. 
이것만 알면 다 해결됩니다. 
이것을 알면 비록 자기 밑에 와서 일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특히 말씀에서 공갈을 그치라고 했습니다. 
당시 주인들은 일하기 싫은 노예근성이 있는 종들에게 일시키기 위해 공갈을 합니다. 
일 안 하면 밥 안 준다고 하고, 묶어서 때린다고 하고, 죽인다고 협박합니다. 
지금은 사주나 고용주들이 말로 협박하거나 봉급이나 승진을 갖고 공갈 협박을 합니다. 
사주나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월급을 주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이것은 마땅히 줘야 하고 그 사람의 것입니다. 월급을 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권리를 빼앗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주들에게는 사주들의 권리가 있지만 고용인은 고용인대로의 권리가 있되, 다 하나님 아래 있는 것으로 알아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모든 일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보이지 않는 상전을 생각해야 합니다. 
종의 위치에 있어도 상전인 사람만 볼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상전인 하나님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겠는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상전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자기보다 높은 상전인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생각하며,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지 않도록 늘 두렵고 떨림으로 부하나 아랫사람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는 일하는 사람으로 때로는 일을 시키는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에게 복종하며 서로를 도와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요 특별히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본분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시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