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7.2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로마서 강해설교 155)
본문 : 롬 14:7-8
제목 :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마릴린 몬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이 많습니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합니다. 
이유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한 여인의 고백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세상을 산다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왜 사는지 삶의 끝은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중요한 인생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
본문 7절 말씀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누구를 위해 사느냐고 질문을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나 자신을 위해 산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나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산다고 고상하게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사실 그 마음속에는 누구나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출세를 하는 것도 나를 위해서 돈을 버는 것도 나를 위해서 심지어 남을 도와주는 것도 사실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분명한데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라는 말은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철저하게 저기 자신을 위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출세하기 위해서 공부도 열심히 한 사람이었으며 종교활동도 최선을 다하여 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아무 것도 가리는 것이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추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자신이 속한 유대교에 충성을 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붙잡아 가두고 핍박을 하는 일에 충성을 다 바쳤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서 회심을 한 후에는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서 회심한 이후에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난 이후에 그의 삶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살았던 그의 삶이 바뀌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의 확장을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이렇게 자신있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삽니다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라는 말은 삶의 목적이 나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좋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다가는 즐기지도 못하고 내 맘대로 하지도 못하고 얽매임을 당하고 속박을 당하는 삶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마음대로 타락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육체적인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건과 거룩을 강조하여서 조금도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엄숙하게 경직되게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참된 즐거움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면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떠나 인간의 쾌락을 추구하지 말고 주님 안에 있는 이 참된 행복을 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라는 말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원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며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해지자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소유들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모여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그렇게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보통의 삶은 소유의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네것 내 것 없이 살자는 것은 공산당이나 일부 사이비 이단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원리는 무시할 수 없는 아주 소중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아주 복잡하게 얽혀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이 되어주는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웃과의 관계 이웃과의 사랑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랑을 매우 우선 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성공의 15%는 지식에 의한 것이고 그 나머지 85%는 인간관계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지지리도 못하던 녀석이 사회에 나와서는 공부 잘 하는 아이들보다 먼저 출세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공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을 여러분도 잘 이실 것입니다. 
이 분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도 무능력하다고 생각을 했고 그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도 꺼려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것은 대인관계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필요한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가치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대인관계의 중요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법,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 인생을 보람있게 사는 법을 꾸준히 배워 나갔습니다.

오늘날 링컨대통령이 그토록 존경을 받는 것은 그의 위대한 업적보다는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익히고 실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4)"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라는 말은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최고의 것임을 알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남을 위한 것이 남을 위한 것으로만 끝이나 버린다면 참으로 허무할 것입니다.

평생을 남을 위해 살면서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그것은 나에게 너무 억울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의 유익을 위해서 살았을 때 그것의 가장 큰 혜택을 받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도둑이 있었답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데 소질이 있어서 평생을 남의 것을 훔쳐서 먹고살았습니다
훔치다 들켜서 감옥에 갔다가 나오면 또 훔치고 또 들어가고 그것이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노인이 되었을 때 기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훔친 것 중에 가장 크게 한탕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도선생이 말을 하기를 "나는 평생 남의 것을 훔치면서 살아온 줄 알았는데 가장 많이 훔친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나의 시간 나의 청춘 나의 인생을 내 자신에게 다 도둑을 맞고 말았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면서 사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것을 도둑맞는 것이요 남에게 나누어주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쌓아 두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2.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본문 7절 말씀 후반절에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 것임을 나타낸다(Olshausen)."라고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고 싶다고 죽고 내가 살고 싶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살기 싫어도 주님이 살라고 하시면 사는 것이요 내가 살고 싶어도 주님께서 그만 살라고 하시면 그만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제임스보이스 목사님은 자기를 위하여 죽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는 말을 두 가지 면에서 생각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상태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와 또 하나는 죽음의 때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두 가지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의 상태에 관해서 우리의 죽음이 주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한번은 이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해야 하는데 어떻게 죽는 것 좋을까요 
사고나 급한 병으로 갑자기 죽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서서히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 좋을까요

서서히 죽어가면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갑자기 자다가 죽는 사람을 부러워할 것이요 갑자기 죽은 사람은 죽기 전에 이것저것 정리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서서히 조금씩 죽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서히 조금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력을 상실하고 청력도 떨어지고 기억력도 희미해지고 심장이나 폐와 같은 기관들도 고장이 나고 근육도 쇠약해지고 말도 하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들어 누워 있어야 하는 상태가 될 때까지 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오래오래 사는 것이 즉 이렇게 서서히 죽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은 그렇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짧아서 그런 것이지 어느 것이 축복이요 어느 것이 축복이 아닌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어떤 상태의 죽음이 우리에게 온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죽음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마음대로 죽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죽음의 때에 관해서도 우리의 죽음이 주님의 뜻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수를 다 누리고 적당한 나이에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들을 뒤로 남겨 두고 인생의 한 복판에서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젊은 나이에 어린아이 때에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이들어 수를 누리며 죽는 사람만 하나님의 뜻이고 젊거나 어린 시절에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든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하에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오늘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음과 삶과 모든 영역을 통치하고 계신다고 믿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신다면 우리는 그 때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려고 애쓰면 안 된다 그러나 말일 하나님께서 갑자기 우리를 소환하시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출발(죽음으로)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죽을 수 없다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 대신 자식 대신 죽어주고 있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대신 죽는다고 해서 그 효력이 없기 대문에 대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가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를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서 사죄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죄의 값을 목숨으로 대신하려고 해도 그것으로 자신의 죄를 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 방법이나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섭리에 의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죽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나 자신의 죄를 위해 아무 유익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든지 우리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통해 우리가 천국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 때 죽음은 비극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의 죽음은 고통스런 세상을 떠나 영생복락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본문 8절 말씀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는 없다고 했습니다.
또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주를 위한 삶이요 죽는 것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강권합니다(고후 5:14a).
우리 주님이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준미을 위해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전 5:16-17).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딛 2:14).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엡 2:10).

주님은 우리의 생애와 생명을 드려 충성할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계속 돌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시고, 천국의 기업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하여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일에 열심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신실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