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8.4.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로마서 강해설교 156)
본문 : 롬 14:9
제목 :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로마서는 지금 상당히 인생에 있어서 심각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에만 관심이 많아서 좀 더 잘 살아 보려고만 애를 쓰지 사는 것 그 자체 죽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지난주에 주신 말씀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우리 하나님께서 주관을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그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믿는다는 것이나 우리의 죽음 이후의 일을 미리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신앙의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 인생들이 그렇게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인지 왜 그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간단하지만 매우 강렬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이를 위하여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를 위하여"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앞 절의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는 말을 받아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그렇게 살고 그렇게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할 때 목적도 없이 이유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활동을 함에 있어서 맹목적일 때가 많습니다

교주 되는 사람이 좀 특별한 은사를 가졌거나 좀 남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확실한 목적도 확고 부동한 진리도 모르는 채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에 다닌다고 부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이 절에 다니는 목적이나 이유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믿는 것인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 잘 모르고 그저 조상들이 믿었으니까 남들이 다니니까 그렇게 따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 내에도 그런 맹신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진리도 잘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잘 모르고 무엇을 위하여 교회에 다니는 줄도 잘 모르고 그저 남들이 가니까 따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진리를 잘 모른다는 것 뿐이지 우리 기독교는 우리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믿는 분명한 목적 분명한 이유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닐 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 죽음의 목적이 주를 위한 것이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와 근거들이 확실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저 할 일이 없어서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의 성도님들은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지만 제발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믿지 말고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진리를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요즘 가끔 외부에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합니다
가는 곳마다 제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발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좀 자세히 알자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너무나 크시고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으로 다 이해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한 한번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확신하건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알게 된다면 알 면 알수록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며 그 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를 알고 체험한 자들은 누구든지 그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2.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오늘 본문 말씀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1)예수님의 죽으심이 주는 교훈 
우리가 이미 배운 로마서 5:6절의 말씀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쓸모없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죽음이란 말씀입니다. 

우리가 뭔가 좀 위대하다거나 뭔가 좀 중요한 일을 할 사람이라고 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죽어 준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죽으시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하셨습니다.

①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죄한 피를 흘리신 죽으심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는 죄인된 우리의 피와 그 가치가 같지 않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죄없는 깨끗한 피를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흘리셨다는 사실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히9:22)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요일1:7)
예수님이 피 흘려 주셨고 우리가 그 피를 믿으므로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는 씻음 받은 줄 믿습니다.

②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대신 담당하신 죽으심입니다.
인간의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 스스로 풀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짐이 죄 짐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 짐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다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셨습니다.

③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남을 위해서 사는 삶을 보여 주신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은 오실 때부터 누군가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러한 삶의 최고의 절정입니다.

인생의 참된 의미와 행복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 아닌 남을 위해 사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고 돈 벌어 남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주었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 하느냐 하십니다.

④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도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죽으심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며, 또한 예수님과 다시 살아나,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다툼도 없습니다. 죽은 자는 누구를 시기하고 분노하며 거짓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죄에 물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내 속에서 불같은 정과 욕심이 생길 때, 분노, 근심, 걱정이 생길 때, '나는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사람'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예수님께서 다시 사심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어렵고 그러나 중요한 신앙의 하나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 도무지 믿어 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으며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①하나님의 뜻(성경적으로)에 의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절에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요 그 예언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성경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요 진리라는 것입니다. 

②역사적인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많은 이방신화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보았으며 베드로와 열두 제자가 수 차례 보았습니다. 
오백명의 성도들이 동시에 보았고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보였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기극이라면 사기를 한해 두 해는 할 수 있어도 이천 년을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③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그가 친히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죽음 앞에 굴복한 나약한 인간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인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④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의 근거이다.
고린도전서 15:13절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곧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절에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⑤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증명한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기에 200년이나 긴 박해 속에서도 초대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켰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수많은 군주들이 박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없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고 그 생명력이 우리의 믿음을 지켜주기에 오늘날까지 우리의 믿음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⑥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죄성에 대해 완전히 죽은 내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내 안에 예수님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내가 운전해 가던 내 인생의 주도권을 예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나의 육체를 가지고 먹고 마시며, 일하며, 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예수님 마음대로,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에 대한 교훈을 몇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그 의미를 다 살펴보려면 끝이 없고 한이 없을 것입니다
대강 이 몇 가지 교훈만 가지고도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3.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에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이 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도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가 죽었을 때도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개를 키우는 것들을 보니까 주인을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떤 주인은 열심히 키워서 보신탕하려고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저분한 개집에서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주는 것만 먹고살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이 그 개의 신세입니다.

그런데 어떤 개는 보니까 주인을 잘 만나 가지고 사람을 어머니로 삼고 사는 개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입는 옷도 입구요 사람이라도 돈이 없어서 잘 가지 못하는 병원에 자주 드나들고 미장원이나 온 몸을 단장시켜 주는 곳에 사람보다 더 비싼 값으로 드나드는 팔자 좋은 개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인과 같이 좋은 집에서 주인의 침대에서 아주 값비싼 식사를 하면서 사는 것이 주인 잘 만난 개들의 팔자입니다.

우리 사람을 개와 비유하는 것은 좀 실례이지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가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은 그 사탄과 함께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그 주님의 듯대로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도 보람된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영원한 나라에서도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그 주님과 함께 우리의 죄악된 생명이 형벌을 받아 죽음으로 우리의 죄의 값이 다 치루어지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을 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