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신경13)
  본문 : 요 19:38-42
  제목 :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최근에 미국의 “바나리서치”라는 기관에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여론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여론조사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여섯 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로 가장 먼저 교회가 너무나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음악이나 영화나 문화나 테크놀로지 같은 현 세대를 대표하는 세상의 문화들을 교회에서는 악한 것으로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현대 악기들이나 음향장비나 영상 등을 사용하는 것을 죄악시하고 옛날 것 그대로를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의 가르침이 너무 깊이가 없고 엉뚱한 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치며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명확하지가 않다고 했습니다.
  뭘 좀 알려고 질문하면 믿음이 없다고 하고 좀 잘 알려고 따지면 교만하다고 하고 무조건 믿으라고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아 믿음이라는 것이 엉터리구나 경우에도 맞지 않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믿으라고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는 과학적 발전과 논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사탄이 대중음악을 점령했다는 책을 써서 한동안 교회들이 
현대음악을 사탄의 음악이라고 해서 교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음악 자체는 대중음악이나 고전음악이나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 좋은 선물인데 사탄이 그 음악을 사용했다고 해서 우리가 음악 자체를 거부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점령한 그 음악을 우리가 다시 찾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 음악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타락하게 하고 사탄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면 그 음악이 사탄의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그 음악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우리도 주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면 그 음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좋은 음악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 주신 음악을 나쁘게 생각을 하고 못하게 하니까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이야기 할 때 얼마든지 더 깊이 연구를 하고 얼마든지 더 과학적으로 밝혀보고 얼마든지 더 논리적으로 살펴보면 그럴수록 그 진리가 더 빛이 나고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대강 적당히 얼버무려버리니까 사람들이 의심을 하고 믿지를 못하고 진리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무나 과학적이고 너무나 논리적이고 너무나 사실에 입각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속에 너무나 깊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가 있고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너무나 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장사한 지 사흘 만에”라는 대목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부분은 없어도 될 만한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별 볼일이 없을 것 같은 짧은 신앙고백에도 깊은 의미들이 들어 있습니다.
  꼭 필요한 뜻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구절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1.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역사 속에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과 함께 꼭 이 장사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에는 다 이 예수님의 장사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에 대해서 기록을 하면서 대강 적당히 어떤 사람이 장사를 지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시에 실존했던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고 자세히 그 과정을 설명함으로서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신 것이 사실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에 의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되신 것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서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구체적으로 그가 공회 의원이었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자고 결의할 때 반대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도 이 사람을 존경받는 공회원이었고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리마대사람 요셉이 부자요 그도 역시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대강 정리를 해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부자였고 공회 의원이었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며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자신의 신분 때문에 그 사실을 감추고 있었지만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공회에서 의결할 때 반대표를 던진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부자이면서 권력도 있는 공회 의원이면서 선하고 의롭고 존경을 받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를 해 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무덤을 가질 수 있는 부자여야 했고
  시체를 달라고 할 만큼 권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했고
  빌라도를 움직일만한 선하고 의롭고 존경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이런 특별한 사람을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그냥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장례를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미리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함께 했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면서 율법사이면서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의 법적이고 종교적인 일을 논의 하는 최고의 권력기관이었습니다.
  유대 최고의 법원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이면서 대법원의 법관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이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아마도 자신의 신분 때문에 남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없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자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배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하던 그 사람입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거듭난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고 우리가 잘 아는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을 그 자리에서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가 자신의 신분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그의 이야기가 또 나오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아서 죽이려고 할 때 예수님을 변호하면서 예수님 편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몰약에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몰약은 당시의 비싼 향료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에 있을 정도로 비싸고 귀한 것이었습니다.
  침향도 그와 같은 향로로 아마 유대인들이 장례를 치를 때 사용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 리트라는 옛날 성경에서는 백 근이라고 했는데 현대어 성경에서 33 키로 그램으로 번역했습니다.

  이 니고데모라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미리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준비하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성껏 세마포로 싸고 무덤에 안치시킨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 사형을 당한 사람은 그 시체를 그대로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장사고 뭐고 없이 시체를 짐승의 밥이 되거나 그냥 없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특별히 시신이 수습이 되고 무덤에 장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서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준비 된 두 사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내기 위해서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성경에는 아리마대 요셉의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 니고데모도 함께 갔거나 그 뒤에 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한 패로 몰려서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일이고 또 원칙적으로 시체를 내주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5장 43절에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당돌하게라는 말은 용감하게 대담하게 라는 말입니다.
  안 되는 일인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일인데 용감하게 담대하게 가서 시체를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존경받는 공회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가서 달라고 하면 주지도 않고 오히려 불순분자라고 감옥에 잡아넣었을 것인데 그럴 수 없도록 권력도 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가 거절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내어줄 수도 없고 해서 백부장을 불러서 정말로 확실하게 죽었는가를 확인한 후에 시체를 내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실존 인물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하시고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서 진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을 하시고 진행하신 일이며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예언을 하신대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무슨 일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하고 미리 준비되고 계획된 일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이 일은 너무나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사전에 다 치밀하게 계획이 되었고 오랜 세월동안 그 일을 위해서 역사를 진행하셨습니다.



2.장사되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예수님의 장사되심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정확하게 실행되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이 장사되심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는 교훈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장사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또 부활하심이 사실인 것을 알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세력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죽음을 부인하려고 애를 씁니다.
  기절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당시에 유명한 권력자였던 빌라도를 통해서 그리고 존경받는 공회원이었던 요셉이나 니고데모 같은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냈다고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장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도 증명을 해 주는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장사된 곳은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아마도 자기의 장례를 위해서 준비했던 아주 좋은 새 무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서 이 무덤을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위에 판 무덤은 아주 튼튼한 무덤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우리처럼 땅을 파고 묻는 것이 아니라 굴을 파고 그 굴속에다가 시체를 넣어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시체를 훔쳐가는 도굴꾼들이나 짐승들이 시체를 손상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바위틈에다가 굴을 파고 무덤을 만든 것이 가장 좋은 무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사되신 무덤은 이렇게 바위틈에 만든 튼튼한 무덤이었고 그 무덤 앞에는 아주 큰 돌로 입구를 막아 사람이나 짐승이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무덤은 이제 사흘 후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한 이 장사되심에서 받는 교훈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면서 말씀으로 하시지 않으시고 이렇게 예수님을 보내시고 고난을 받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장사되게 하시고 그리고 부활하게 하신 것은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도 결국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살게 되고 이런 과정을 통과한 후에 부활과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고 결국은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장사를 지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죽는 것은 더 싫어합니다.
  그리고 장사를 지내는 것은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이런 것들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땀 흘려 일하기도 싫어하고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헌신을 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평안하게 놀고먹고 재미있게 살려고만 합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고난도 기쁘게 받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고난이 없는 삶은 행복도 성공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죽습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가는 것이나 죽어가고 있는 것을 원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하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 부활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좀 늦게 통과하거나 좀 일찍 통과하거나 별 차이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맺은 인연 때문에 정 때문에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의 길로 가는 관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은 이 죽음의 문이 심판의 문이고 형벌의 문이고 끔찍한 고통으로 인도하는 아주 흉악한 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고 온갖 몸부림을 다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어가는 이 죽음이라는 문은 영광으로 가는 문이요 거기에는 상급과 영생의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는 너무나 좋은 문입니다.
  
  죽음이 고통의 문이 되느냐 영광의 문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여기에서 나누어집니다.
  죽음의 문이 영광의 문이 되고 자랑스러운 문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믿음의 중요성을 알고 어떻게 하든지 이 믿음에서 떠나지 말고 믿음을 강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의 장례식은 사실 축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존경받는 목사님이 죽어서 장사를 지내는데 장례식이라고 하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성식이라고 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서 나는 지금 천국에 간다고 사람들에게 공포하는 일이 좀 교만스럽게 보이기는 하겠지만 우리가 아는 진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가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장례식을 천국 입성식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다만 교만하면 안 되고 내가 뭘 다 한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시고 장사까지 되신 일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부활을 몸소 보여주시기 위해서 중요한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죽고 장사지내게 되지만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죽음 넘어 장례식 넘어 있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죽으심이 역사 속에 일어났던 사실 인 것처럼 예수님의 장사되심도 역사 속에 일어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서 진행하신 일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고 우리도 결국은 죽어 장사되지만 부활과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결국은 늙고 죽게 되지만 그 이후에 우리 믿는 자에게는 부활과 영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