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37)

  본문 : 행 2:42   

  제목 :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요즘은 짝퉁이나 가짜들이 너무나 많아서 진품을 구별하기가 힘이 듭니다.

  어떤 짝퉁들은 오히려 진짜보다 더 좋아 보이기도 하고 사용하는데 있어서도 진짜 못지않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진품을 비싸게 사는 것보다 적당한 짝퉁을 싸게 사서 사용하는 것도 살아가는 요령일 것 같습니다.

  음식같이 건강에 지장을 주고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가짜를 사먹어서는 안 되겠지만 옷이나 가방 같은 것은 메이커 없는 가짜면 어떻습니까? 겉보기에 그럴듯하면 되고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으면 되는 것을 굳이 진짜를 산다고 신경 쓰고 돈 많이 쓰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모든 교회가 다 바른 교회라면 아무교회나 다니면 되겠지만 교회라는 간판은 걸었는데 이단교회들이 많이 있고 거짓선생이 침투해서 이상한 것을 가르치고 이상한 길로 가게 하는 교회들도 더러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잘 살펴보고 참된 교회인지 그렇지 못한 교회인지를 구별을 해서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짜 명품을 속아 사면 돈 좀 손해 보면 되고 가짜 식품을 속아서 사 먹으면 좀 아파서 병원에 다니거나 최악의 경우 육신이 죽음을 당하면 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다닌 것이 엉터리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이고 영원한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신중하게 생각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겉으로만 보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니까 큰 교회 사람들이 많은 교회 특별히 유명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이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거기로 모여듭니다.

  때로는 가짜 이단 교회들이 겉보기에는 너무 좋고 사람들이 바로 현혹되도록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을 많이 하기 때문에 더 잘 속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말씀 곳곳에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근거들을 많이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런 근거들을 토대로 만든 개혁주의 교회의 교리에서 참된 교회의 증표를 세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 전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례를 바르게 시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성례는 세례와 성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권징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권징은 벌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회개하고 바른 길로 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것들을 자주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목숨을 걸지만 정작 중요한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경향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중요하다는 것과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계속해서 살피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지가 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것, 그 가르침에 따라서 서로 교제를 하는 것, 그 가르침을 받아서 성찬예식을 행하는 것, 그리고 오늘 우리가 생각할 그 말씀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 이런 것이 참된 교회를 구별하는 표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성경공부를 통해서 성도들을 가르치는데 아무 것이나 가르친다고 다 교회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쳤던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가가 핵심적인 교회의 구별법이 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듣기 좋은 설교를 하고 아무리 그럴듯한 좋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성공하는 좋은 방법들을 가르친다고 해도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과 관계가 없거나 거리가 먼 것이라면 그것은 가르침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제를 함에 있어서 정말로 좋은 파티를 열고 정말로 서로 훈훈한 정을 나누고 서로 가진 것을 다 나누어주는 교제가 있다고 해도 그 교제가 사도들의 가르침과 관계가 없는 교제라면 그 교제가 참된 교회임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한 형제자매요 한 몸이 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제는 의미가 없는 사교모임일 뿐입니다.


  성찬예식을 행함에 있어서도 거기에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예수님께서 살을 떼어서 나누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없는 성찬은 별 의미가 없는 상찬이고 참된 교회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마지막으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호흡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나 성도나 기도하는 성도가 진짜 성도이고 기도하는 교회가 진짜교회임이 분명합니다.


  교회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교회가 없고, 성도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기도에 있어서도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바른 기도를 하는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가에 따라서 참된 교회를 구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너무나 광범위한 것이고 엄청나게 많은 종료의 기도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 이 한 시간에 기도에 대해서 다 살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교회의 표지로 삼고 있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의 기도


  교회의 표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르침에 따라서 기도도 해야 바른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이 바르지 않은 교회에서의 기도는 바른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중세교회의 예배나 기도가 바르지 못한 것은 가르침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지 않고 율법의 행함과 선행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서 복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는 당연히 잘못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인간들이 미신적으로 고안해낸 여러 잡다한 것들을 짜깁기해서 예배규범을 만들어내었다. 구원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하는 것인데도 그들은 구원을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들은 무수한 불경스러운 망언들로 완전히 더럽혀져 있다.”라고 했습니다.


  구원의 소망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하는데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의 기도는 불경스러운 망언들로 완전히 더럽혀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도 많은 교회들이 칼빈이나 루터가 주장한 개혁주의를 떠나서 다시 중세 타락했던 로마 가톨릭이 이야기하던 대로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고 여러 가지 미신적인 요소들을 가르침으로 인해서 교회의 성도들의 기도가 원래 모습에서 벗어낫습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불경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개혁주의를 떠난 자유주의 인본주의 기복신앙 저급한 신비주의 은사주의자들로 인해서 기도가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개혁주의를 따른다는 교회 안에서도 이런 교회들의 영향을 받아서 원래의 바른 기도가 아닌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자유주의 인본주의의 사상으로 성경을 배운 사람들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기도합니다.

  당연하게 인간의 의를 내세우며 자기 자신들의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처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당당하게 기도를 드렸는데 예수님께서 이 기도는 외면하셨습니다. 

  기복신앙 즉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당연히 세상적인 축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녀들의 진학과 출세를 위해서 기도하고 건강과 장수와 행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급한 신비주의 은사주의자들은 당연히 신비한 능력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적이 일어나서 병을 고치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세상의 문제들이 다 해결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기도 때문에 우리 개혁주의교회에서도 그들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순복음교회는 우리와 신학사상이 현저하게 다른 교회입니다.

  그들은 오순절 신학사상 즉 오순절에 성령님의 강림으로 나타난 성령의 은사들을 제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교나 기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회”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기 보다는 성부하나님이나 성령하나님을 강조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별로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보면 오순절 신학은 우리와 너무나 다른 신학입니다.

  원래는 이단이라고까지 말했지만 그들이 너무 커지고 잘나가니까 감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순복음 장로교회가 생길정도로 그들의 신학이나 기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면 그들의 기도는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나온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성경적 기도의 핵심에서 많이 비껴나간 기도입니다.


  기도도 교회의 변질과 함께 많이 변질된 형태의 기도들이 교회 안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좋다는 것만 강조하고 무엇이 참된 기도인지 가르치지 않으니까 엉터리 기도를 하고 있으면서도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삼아 무기삼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기도하면 하나님께 뭘 좀 해달라는 기도를 많이 합니다.

  물론 그 기도에 앞서 감사도 드리고 영광도 돌리고 회개도 하고 그리고 나서 간구도 합니다만 무엇을 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세상 살면서 억울한 일이 있으면 자꾸 재판장을 찾아가서 괴롭히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던 그 혼자 사는 여인처럼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호소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이렇게 바르게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왜 저는 앞길이 안 열리고 점점 더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 그 억울함을 호소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해서 예수님까지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무엇인들 안 주시겠습니까?


  다윗도 시편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10:1,13:1-2)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나아와서 소원을 아뢰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래서 살길을 찾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의 전부가 아니고 늘 그런 기도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기도는 참된 교회의 지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는 기도는 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감사를 드리는 기도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 바른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기도요 이런 기도가 없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이렇게 찬송을 드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열심히 찬송을 드립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더 귀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날 구원해 주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날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세상에 잘 알지도 못한 나를 뭐 잘나지도 못한 나를 예쁠 것이 하나도 없는 나를 위해서 당신의 귀한 몸을 찢어서 나를 주셨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워서 이렇게 시를 쓰고 곡을 붙여서 가슴이 터지도록 목이 터지도록 부릅니다. 

  이 노래가 주님께 드리는 영광과 감사의 기도요 참된 교회에 있어야 할 바른 기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시간마다 기쁨으로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찬송을 부릅니다.



  서로 교제를 나눈 성도들의 기도


  기도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그 가르침을 받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도는 그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이 서로 교제를 나누면서 드리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교제를 나누면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요 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친밀함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특별한 사람들임을 확인하는 것이 교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이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같은 목적지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교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사는 것은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잘나기도 하고 못나기도 하고 부자이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지만 친형제보다도 더 친한 한 몸의 지체들로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 만나 위로하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의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항상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타락을 하든지 신앙생활을 잘 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그냥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기쁘면 되고 나만 교회 안에 있으면 되고 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내가 당하는 것처럼 우리 중에 누가 유혹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면 내가 당하는 것처럼 서로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처럼 서로 교제를 하는 성도들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라고 하면 모든 것이 그렇지만 그 원형을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는가를 보고 우리도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그 내용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기도의 형식만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기록들을 보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고(눅 5:16), 산에 가서 밤새도록 기도하셨고(눅 6:12), 새벽이 아직도 밝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막 1:5).

  또 기도를 하실 때 땀방울이 땅에 떨어져서 핏방울이 되도록 애를 써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눅 22:44).


  이런 기사들을 통해서 기도를 할 때 산에 가서 해야 하고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해야 하고 새벽에 기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애를 써서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방법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에 또는 밤을 새워서 한적한 곳에 가서 산에 가서 기도를 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셨으며 무엇을 위해서 기도를 하셨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기나 방법만 예수님처럼 하려고 하면서 정작 중요한 그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관심이 없이 그 내용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내용과 반대가 되는 내용까지도 기도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항상 나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라고 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우리 서로를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 우리가 죄를 범하여 형벌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기도해주셨습니다.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의 무지를 아시고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아시고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우리 서로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한 성도들의 기도


  기도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성찬예식을 행한 사람들이 그 정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찬예식에는 사도들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가 어떤 혜택을 받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성찬예식입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이 내 몸이다.

  마셔라 이것이 내 피다.

  내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피로세운 새 언약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내가 다시 오는 날에 나처럼 부활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완전하게 죄 사함을 받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고

  영혼이 육신이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애씀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을 하시고 미리 선택을 하셔서 우리를 불러내셔서 이렇게 특별한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무슨 기도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뭘 또 더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서 세상 사람들이 뭘 모르고 구하고 있는 헛된 것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사탄은 늘 우리를 유혹하려고 여기저기 함정을 파고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습성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서 우리 자신도 늘 다시 죄악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마음과 육신이 연약하여서 늘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예수님을 더 깊이 일고 나를 구원해 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더 잘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어떤 유혹이 와도 흔들림이 없이 이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 속에 있게 해 주옵소서

  세상의 일은 어떻게 된다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이 은혜 안에 머물도록 만 해 주시옵소서.


  너무 가난해서 세상 살기 힘들어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도록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너무 비참해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만 해 주세요.

  부자가 되거든 너무 배불러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도록 내게 있는 것들을 주님을 위해서 주님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저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저를 택해서 이 귀한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면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증인이 되어 증거하는 이 일에 귀하게 쓰임 받게 해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사도들의 바른 가르침을 받고 성찬예식에 참여한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특권이자 우리를 바르게 살게 하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대로 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으로 기도하고 감사의 시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 몸의 지체된 우리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 진리의 길을 끝가지 가면서 다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피로세운 이 새 언약에 참여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일인지를 알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