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2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42)

  본문 : 행 3:1-2   

  제목 :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사도행전을 통하여 우리가 다니고 있는 이 신약교회의 본래 모습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워가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를 살펴보면서 교회가 가르쳐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교회가 시작되면서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님의 강림과 그로인해 나타난 일들을 살펴보면서 교회의 본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3장에 들어와서도 교회의 본래모습과 가르쳐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10절까지는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기적적으로 고쳐주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부터 26절까지는 그 사건을 가지고 베드로가 설교를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과 설교에서 우리는 기독교의 참된 모습을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단순히 보면 간단한 사건 하나와 간단한 설교 한편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우리가 믿는 진리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사건 하나와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설교 한편을 그냥 기록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또 지금 우리들에게까지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 세심하게 기록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먼저 앉은뱅이 한 사람이 고침을 받는 기사를 살펴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를 말하는지 그 사람을 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옛날 성경에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라고 표현합니다.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걸을 수도 일어날 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뒤에 4장에 의하면 40세가 된 사람입니다.

  태어나서 40년 동안 일어서지도 걷지도 못한 상태에서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이나 해서 먹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서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까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정말로 힘이 솟아나는 장면입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이런 말씀을 붙잡고 실지로 한번 해 보고 싶은 대목입니다.

  이렇게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서라 라고 외치면 어떤 사람이든지 벌떡 일어나고 어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든지 벌떡 일어나 재기를 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자신이 좀 신령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은 한 번씩 흉내를 내보기도 하는데 그 결과는 별로 신통치 않은 것 같습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일을 행하실 때 쓰시는 방법이라고 이해합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가는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믿게 하기 위해서 기적적인 방법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뒤에 베드로 사도가 설교를 하게 되는데 그 설교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가 거짓이 아니고 사실임을 믿게 하려고 이런 기적적인 일을 동원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단순히 사실적인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적인 역사이면서 그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이 이야기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일어난 이야기라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전’이라는 장소성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성전은 유대교 사람들이 다녔던 곳이고 우리는 교회당이라는 다른 장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성전은 중세 시대 타락한 로마 가톨릭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교회당을 웅장하게 꾸며 성전처럼 흉내를 냈던 곳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자 칼빈 같은 분은 성전에 올라 간 것은 장소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석을 합니다.


  이들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간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여기 구시는 우리가 쓰는 시간으로 오후 3시를 말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성전에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아침 아홉시, 낮 열두시, 그리고 오후 세시에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그렇게 했는지 열심히 있는 사람이나 지도자들만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시간 특별히 오후 3시는 하루 일과를 마치는 해가 질 때이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날도 베드로와 요한이 이제 성전 시대가 끝이 나고 새로운 기독교의 교회가 시작이 된 줄도 모르고 성전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이라는 장소에도 많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성전을 복음 전파의 장소로 사용을 했겠지만 그러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는 이 성전이라는 곳에 많은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가 쓴 누가복음에도 성전으로 시작을 해서 성전으로 이야기를 마치고 있고 사도행전에도 계속 그 성전을 주요 장소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 세례요한의 출생과정을 소개하면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그의 아내가 아들을 잉태할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소개하면서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일하던 사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성전에서 주의 사자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들었고 그 예언의 말씀을 따라 세례요한이 태어났고 그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다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마지막장 24장에서 그 끝을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그들을 축복하셨는데 그 축복을 받고 제자들이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눅 24:53)로 누가복음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와서도 성도들이 늘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고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를 성전으로 지목을 했고 사도들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성전을 부정적으로 보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고 하시면서 그 성전이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눈에 보이는 성전은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지 못하고 하나님께 바르게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성전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을 부정적으로 보셨고 이제 예수님을 몸으로 하는 새로운 교회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그런 예수님의 뜻을 몰랐을까요?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에도 이런 예수님의 성전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성전 안에서의 활동을 의식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기독교의 시작을 알리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교회가 성전과 상관이 없는 다른 종교가 아니라 성전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은 모세시대 때 시작한 성막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처음 성전을 지었고 그 성전은 바벨론 느브갓네살을 통해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시면서 바벨론 왕을 통하여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성전과 성벽을 건설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도 여러 번 부분적으로 붕괴되어서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해서 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에 AD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성벽만 남았고 그 성전 터에는 이슬람의 성전인 황금사원이 지어져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성벽을 붙잡고 통곡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를 로마 가톨릭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로마 가톨릭이 성경에서 벗어나서 교회가 가는 길이 아닌 엉뚱한 길로 가고 있을 때 우리는 본래 자리를 찾아서 바르게 교회를 개혁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유대교에서 분리해 나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유대교에서 분리해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받들어서 바른 길로 간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고 그 후손에게 주신 율법도 우리들의 것이고 성전도 우리의 것이고 제사도 우리의 것입니다.

  잘못 이해한 것들을 바로잡았을 뿐이고 우리의 뿌리는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부터 시작이 되었고 구약에 기록된 모든 역사들이 우리들의 것이고 우리들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뿌리를 거기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성전을 배경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의 뿌리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가르쳤던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알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드렸던 제사의 의미를 알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절기들도 그 의미를 바르게 알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다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율법을 완성하시고 단번에 제사를 드려주셨기 때문에 그 방법은 다릅니다.

  율법을 지키는 방법은 좀 다르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이나 뿌리는 소중하게 여기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본문 2절 말씀에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많은 병자들을 고친 기사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환자들과 죽은 자들은 우리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들입니다.


  소경은 영적으로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우리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귀머거리는 영적으로 귀가 멀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우리 인생들을 말합니다.


  중풍 병이나 문둥병은 우리 인간이 심각하게 타락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보여주고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죽어 있는 인생의 불쌍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도 우리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비록 이렇게 건강하게 일어나기도 하고 걷기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못 걷게 된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자신의 실수나 사고로 불구자가 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불구자로 세상에 나온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병이 고칠 수 없는 선천적인 질병이라는 것을 말해주면서 그의 치료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베푸신 기적적인 방법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 인생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살고 싶지만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좋은 일만 하고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해야 할 좋은 일은 하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잘못된 일이 많고 실패가 많고 원하지 않는 곳에 와 있을 때가 많은 어쩔 수 없는 인생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보고 왜 그렇게 사느냐고 질책을 합니다.

  똑바로 살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걸 우리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교회 초창기 때 송명희 시인이 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가 지은 노래 중에 “똑바로 보고 싶어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똑바로 걷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몸짓으로

  똑바로 걷고 싶어요 주님 기우뚱하기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날 때부터 중증 뇌성마비로 태어나서 온몸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자신의 육신을 보면서 우리 인생의 모습을 이야기한 노래입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는 똑바로 걸을 수 없는 불구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잘못이 아닌 날 때부터 그렇게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고 이렇게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어서 아직도 조금은 부족하고 마음대로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교회에 와 있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이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전 입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는 것은 제일 큰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거기만 들어갈 수 있었고 여자들도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거기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구자들은 아무 곳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에 문 앞에만 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성전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가까운 곳에서 매일 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막상 그 안에는 한 번도 들어 가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별 볼일이 없는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특별한 특권을 가진 사람들만 들어가기 때문에 이 사람은 문 앞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옛날 성전인 교회당에 이렇게 들어와 있습니까?

  율법시대 때는 우리 같은 이방인은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값없이 은혜로 이런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교회를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고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오라고 하지만 그들 자신이 들어오지 못하는 불구자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마음껏 하나님 앞에 나오셔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많은 복들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것보다 먹을 것을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았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달라고 구걸할 것이 아니라 나를 좀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영적으로도 불구였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몰랐을 것이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영적인 축복인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구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물가에 여인처럼 헛되고 헛된 이 세상의 것들을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바로알고 믿는다면 이 세상의 잡다한 것들을 달라고 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 자유롭게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죄의 길로만 가고 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만 앉아 있는 것처럼 교회 밖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의 것만을 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영적 불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고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참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으로 받게 되는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마음껏 누리시고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