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1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사도행전 060)
  본문 : 행 4:12   
  제목 : 예수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성경은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성전 건축이나 성벽을 건축하는 것이나 왕궁의 건축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집을 짓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좋은 집에서 살기 위해서 평생 노력하고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주택에 사는가, 아파트에 사는가, 몇 평짜리에 사는가, 그리고 그것이 내 집인가 전세인가 월세인가 이런 것으로 우리 인생이 평가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진리를 교훈할 때 이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해서 설명을 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실 때쯤 말씀하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건축가는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반석 위에다가 집을 지으면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모래 위에다가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기초를 파기도 쉽고 평지라서 쉽게 집을 지을 수 있겠지만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반석을 예수님이라고 하고 또 그 반석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거기서도 예수님이 집을 세우는 집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터 위에 건축을 할 때 무슨 재료를 써서 건축을 하는가의 차이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짓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이집이나 저 집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지만 불이 나보면 그 가치가 구별이 된다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이 나도 그 가치가 그대로 있지만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다 건축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초를 무엇으로 하느냐 그 건축물을 무엇으로 짓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하고 그 믿음이 가짜가 아닌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을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1절의 말씀을 통하여 어리석은 건축자들이 집을 세우는데 가장 요긴한 기초 석을 몰라보고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 귀한 기초석이 되시는 예수님을 몰라보고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 가장 소중한 기초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기초석이 되시는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에서 좀 더 쉽게 번역을 했습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건축자와 같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무엇을 기초로 하고 무엇을 주재료로 건축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중요하다

  오늘 본문 말씀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구원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구원 받을 수 없는가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지만 먼저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정상적인 사람인지 비정상적인 사람인지, 내가 지금 의로운 사람으로 사는지 죄인으로 사는지, 내가 절망으로 달려가고 있는지 밝은 소망스런 내일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같이 위기를 맞이한 인생들이 그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멸망당한다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아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각이 계획하는 일이 하는 행동이 다 악함을 보시고 이 땅에 인생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시고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멸망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모르고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다가 모두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 시대 때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불로 멸망을 시키려고 주의 사자가 그 성을 찾아가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오히려 그 주의 사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나쁜 짓을 하려고 덤벼들다가 그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모세 시대 때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애굽의 바로와 그 병사들이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뒤쫓아 옵니다.
  마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건너가게 하려고 홍해 바다 가운데 길을 내셨는데 애굽의 병정들도 그 바다 속으로 뛰어듭니다.
  바다길이 닫혀서 그들이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게 되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뛰어들어서 다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오늘 밤에 죽는 줄도 모르고 그동안 창고를 크게 짓고 엄청나게 재물을 모아놓고 흐뭇해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독사의 자식들과 같다고 책망을 받을 사람인 줄도 모르고 폼을 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요?
  다행스럽게도 정말로 감사하게도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길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하여 늙어가고 병들어 가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닫고 구원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그 죄의 심각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 같습니다.

  신학교에 가니까 교수님들이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의 삶을 질타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고 목사들이 성도들 교육 바르게 시켜서 바르게 살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훌륭한 목사님들이나 세상에서 성공한 장로님들이나 뭔가 바르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비웃습니다.
  왜 그렇게 한심하게 사느냐고 비웃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 따라 살지 못하고 나쁜 짓을 하면서 사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우리 같은 삶을 살아봤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머리가 좋아서 인류대학 나오고 유학 갔다가 와서 좋은 대학의 교수로 생활의 어려움이 없이 살지만 열심히 공부해도 영어단어 하나 잘 외어지지 않는 그런 머리로 살아봤습니까?

  당신은 부모님 잘 만나서 집도 받고 재산도 받고 잘 살지만 가난하게 태어나서 빈손으로 시작해서 힘들게 살고 있는 이런 인생을 살아봤습니까?

  당신은 노력을 해서 성공을 했지만 하는 일마다 잘 안 되고 몸은 자주 아프고 손잡아 주는 사람 하나 없는 이런 힘든 인생을 살아봤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때로는 거짓말도 해야 되고 때로는 아부도 해야 되고 때로는 뇌물도 갖다가 줘야 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쓰러 넘어뜨려야 하는 이런 인생을 살아 봤습니까?

  돈이 없어서 세금도 못 내고 공과금도 못 내고 빌린 돈도 갚을 수 없고 남에게 밥 한 그릇 사기 어려운 이런 인생을 살아봤습니까?
  
  우리 인생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됩니다.
  인간답게 바르게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형편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문제는 그런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 타락하고 오염된 죄악 된 본성입니다.
  핵폭탄이 무서운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핵폭탄을 만드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무서운 것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엄청난 사람들을 아주 비참하게 죽여 버릴 수 있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이 문제입니다.

  돈 몇 푼 때문에 다른 사람의 전 재산을 빼앗기게 하고
  돈 몇 푼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빼앗고
  돈 몇 푼 때문에 다른 사람의 영원한 생명을 빼앗고
  사소한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흉악한 인간의 본성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같은 사람도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19-24)

  바울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이런 죄악이 자리 잡고 있고 선을 행하기보다는 악을 더 행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더 할 것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도 구원을 받아야 하고 그도 구원자가 필요하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더 구원이 필요하고 더욱 큰 능력이 있는 구원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다른 이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이 말씀에서 오직 예수님만 구원이 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주가 되십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잘 모르거나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의 예수님을 믿고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고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즉 구원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좋은 대로 예수님을 알고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불치의 병을 고쳐주시는 분으로 알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몰려왔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병도 고쳐주시고 마음의 상처도 치료해주시는 그런 분으로 알고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든 육신과 영혼을 치유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런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우리 육신의 먹고 살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알고 따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농사도 짓지 않고 40년 동안 기적적으로 먹고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행하여 주실 줄 알고 따랐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육신의 삶에 복을 주시고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을 더 성공적으로 살고 더 많은 복을 받아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실 분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도덕적이고 바른 삶을 살게 해 주실 분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말씀해 주시고 몸소 행하시는 귀한 선생님으로 알고 따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처럼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렵고 연약한 사람들 죄가 많은 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어렵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윤리 도덕 선생님이십니까?
  예수님이 바른 삶의 본을 보여주는 스승이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어려운 삶을 도와주시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에 기적을 일으켜주시는 능력자이십니까?
 
  그러나 이런 일들은 제가 자주 말씀을 드리는 대로 부스러기 축복이고 보너스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셨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나를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십니다.
  나를 억만 죄악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저주와 죽음과 멸망에서 건져내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그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부활하신 그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가운데 다시 오실 그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신령한 일을 행하였다고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교회가 나를 구원하고 좋은 목사가 나를 구원하고 엄청난 일을 행한 교주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그분만 나를 구원하실 구주가 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 때 내가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은 없다.

  오늘 본문 말씀에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누구의 소관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이 없거나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우리 인간의 편에서 우리가 행한 대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바르게 살 때 구원을 받는 것이고 계속해서 죄나 짓고 살면 지옥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성령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오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이고
  우리를 끝까지 붙잡고 있다가 천국에 가게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그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구원을 얻게 해 주시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하는 흉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꼭 필요합니다.
  이런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구원에 관한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이나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제일 중요한 기초요 중심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