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로 섬깁시다

 

 

 디모데전서 112-17

 

 

나를 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께 내가 感謝함은 나를 忠誠되이 여겨 내게 職分을 맡기심이니 내가 에는 誹謗者迫害者暴行者였으나 도리어 矜恤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하였음이라 우리 恩惠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豊盛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罪人救援하시려고 世上하셨다 하였도다 罪人 中에 내가 魁首니라 그러나 내가 矜恤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一切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를 믿어 永生 얻는 들에게 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永遠하신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尊貴榮光永遠無窮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교회는 영적 가정입니다. 교회는 한 분 하나님만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형제요, 자매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가정인 교회를 돌보십니다. 자녀인 성도들을 언제나 바라보시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하시고, 가장 필요한 때에 공급하십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 그 모든 길에 함께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리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또한 자녀가 된 성도들은 그 교회 안에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으로 우리의 형제와 자매를 섬깁니다.

결국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섬기는 존재이지 섬김을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이지, 그 누구에게도 나를 섬기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섬김이 아무렇게나, 또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의 섬김을 위해서 질서라고 하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를 위해서 직분(職分;διακονία)”을 맡기셨습니다. 여기의 직분은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어떤 직분이 맡겨진 것은 섬김을 위한 것이지, 결코 그 직분이 지위를 보장하고 섬김을 받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도 각자가 맡은 직분이 있습니다. 그 직분에는 교회법의 규정을 따라 맡겨진 것도 있고, 때로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맡겨진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직분이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명예를 보장해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때로는 그 직분에 따르는 부담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서 많은 희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직분의 문제나 섬김의 문제를 생각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은 사람의 뜻이나 사람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의 근거는 철저하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교회로부터 어떤 직분을 맡았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나의 유익을 구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그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 인해 교회가 유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직분의 의미가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이 섬김의 문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분을 맡았다고 말합니다. 본래 바울 자신은 그 직분을 맡을 조건이나 자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사도라고 하는 엄청난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직분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직분을 감당하는 자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감사(感謝;χάρις)”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서의 모든 섬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 같은 자에게 직분을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감사가 없이는 우리는 올바른 봉사와 섬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는 언제나 감사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나에게 맡겨짐에 감사, 내가 할 수 있음에 감사. 나를 통해서 그 일들이 이루어짐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나의 섬김과 봉사에 앞서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사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자신의 신앙 간증입니다. 이를 통해서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디모데에게 권면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의 섬김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 감사로 섬깁시다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능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능하게 하신이라는 표현은 가능하게 하다, 힘을 제공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힘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나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직분이요 사명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붙드셨고, 그 일들을 능히 감당하도록 도와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의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맡기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었습니다. 즉 바울이 사도라고 하는 직분을 맡은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시고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이 다메섹의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울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 그리고 지금 다메섹에 왜 왔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기를 주저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나니아에게 예수님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9:15-16).

아나니아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안수하면서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9:17). 이 때로부터 바울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그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미워했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따르며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그가 이제는 그들에게서 형제라고 불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이 예수 그리스도에서 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맡기시고, 감당할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충성되이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충성하는 사람으로 간주했다, 믿을 만한 사람으로 인정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가 과연 예수님께 충성하는 자였습니까? 그가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자였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는 그 때 이미 자신이 예수님께 충성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아마도 바울이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의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 사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전혀 충성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극도로 불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나를 충성스럽게 보아주시고, 믿어주시고, 맡겨주셨습니다. 이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내가라는 표현을 강조합니다. 오늘 내가 교회에서 직분을 감당합니다. 내 시간을 희생하고, 내 마음을 희생합니다. 결국 우리는 내가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그 희생과 헌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 일을 감당하도록 직분을 맡기신 분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형편을 만들어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나에게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무엇보다도 믿음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이 모든 것이 나에게서 나왔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교회의 일은 내 힘과 내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한 것은 바울 자신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내가 잘 나고, 내가 지혜롭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 예수님께서 나를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이 나를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하셨습니다. 나는 충성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나를 충성하는 자로 인정하셨습니다. 세상은 나를 인정하지 않지만, 우리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섬기는 모든 일은 바로 이 감사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에게 직분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주님을 향한 감사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제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위한 사도로서 그 직분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자신에게 넘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문에 따르면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는 표현이 가장 앞에 등장합니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강조하고 싶은 표현을 앞에 배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신에게 너무나도 풍성하게 임하셨음에 대해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자신의 계산으로 도저히 측량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헤아리고자 해도 그보다 더 풍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에게 이토록 넘치는 은혜가 임한 것은 그가 고백하는 자신의 과거와는 너무나도 비교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과거 자신이 복음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어떤 자였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바울의 이러한 소개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과거 자신의 모습과 대조되는 에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비방자였다고 합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어리석은 말을 하는 자, 상처를 입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로마서 224절에서는 모독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거에 복음을 철저하게 모독하는 자였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은 말로 복음을 대적하는 자였습니다. 그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철저하게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은 자신이 박해자였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격하듯이 필사적으로 그 뒤를 쫓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에게 있어서 사냥감일 뿐이었습니다. 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은 사냥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 가두고 때리고 죽이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훗날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간증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복음과 교회를 박해했던 모습을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라고 소개했습니다(22:4). 이처럼 바울은 철저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와 복음을 박해하는 일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로 바울은 자신이 폭행자였다고 합니다. 이는 광포하고 무례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30절에서는 능욕하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즉 바울은 과거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회상해도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도저히 복음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쳤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도저히 구제불능의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은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변화입니까? 바울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은혜를 바울에게 베푸셨습니다. 그 포악한 인간 사울을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이토록 놀라운 은혜를 받고 변화될 수 있었던 요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심에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13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긍휼을 입은 것(λεέω)”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김을 받지도 못하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은 주님이 보실 때 불쌍히 여기실 만한 존재도 못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러한 긍휼을 입을 수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했기때문입니다.

본문 13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율법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즉 구약성경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에서 바울이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육체적인 지식은 풍성했을지라도 영적인 눈은 전혀 뜨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보아도 깨달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말씀을 엉뚱하게 해석했고, 그로 인하여 그는 복음의 원수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을 주님이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그토록 무거운 죄악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원수로 살고 있는 그를 불러 복음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바울이 알지 못하고 행하던 그 모든 일에 대해서 긍휼의 옷으로 덮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에게 넘치도록 풍성하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였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래 참으셨기때문입니다.

본문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에 근거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래 참으심은 마땅히 진노하셔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 진노를 유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표현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에 대해서 인내하시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가 결과적으로 인간의 멸망이 유보되는 것으로 나타났고, 죄인에 대한 용서를 가져왔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토록 흉악한 대적자 바울에게 오래 참으셨을까요? 그것을 바울은 (;ποτύπωσις)”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형상의 자국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은 바울에게 나타날 결과가 그 후에도 계속해서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Robertsen이라고 하는 신학자는 바울은 예수께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바로 그 죄인들의 견본(見本)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의 대상인 죄인 중의 괴수로서의 본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의 본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교회의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만큼 복음을 박해하던 자가 있었을까요? 바울만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을까요? 바울만큼 복음을 위해 크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진수를 바울만큼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한 사람이 있을까요? 바울만큼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알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러한 바울에게 긍휼의 은혜를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엉뚱한 길로 달려가고 있는 바울을 주님이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바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복음의 대적자로 살고 있을 때, 그를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만나주셨습니다. 그를 부르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를 복음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에 대한 감사가 바울이 복음의 사도로 사역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내가 우리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내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바울보다 나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 때에 바울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악하고 더러운 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나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나를 부르시고 내 영의 눈을 뜨게 하시고 예수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내 안에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직분을 맡기시고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내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 긍휼히 여기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대하여 오래 참으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심지어 나 같은 자에게 복음과 교회를 위한 직분을 맡기시고 감당하게 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감사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과 교회를 섬기는 자로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17절에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그 은혜의 대상자라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자신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처럼 고백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바울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찬양이 우리의 찬양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복음과 교회를 위한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부족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능하게 하셨습니다. 충성된 자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온갖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오래 참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감사로 섬겨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섬겨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에 대해서 감사로 감당해야 합니다. 감사가 없는 충성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으로부터 맡은 직분 앞에 감사하며 섬김으로 주님 앞에 섰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는 큰 칭찬을 듣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