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7.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전 48)
본문 : 벧전 5:5-6
제목 :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어느 마을에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지내던 두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쪽 집의 닭 한 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이쪽 집 아이가 그것을 보고 저쪽 집 친구에게 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 가서 계란을 낳았으니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아이가 자기 집에 가보고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쪽 집 아이가 거짓말 하지마라 내가 계란을 낳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두 아이가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나는 못 보았다. 옥신각신하면서 싸우기 시작을 합니다.

이것을 본 두 집 엄마도 맞붙어서 서로 머리카락을 붙잡고 싸우기 시작을 했습니다.
양쪽 집 아버지도 같이 싸웁니다.
화가 난 한쪽 집 아버지가 상대편 집에다가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불이 자기 집에도 건너와서 두 집이 그만 다 불에 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잿더미 위에 앉아서 별을 쳐다보면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이제 반성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계란 하나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계란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들어있던 자존심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끔찍한 참사의 원인이 계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자존심과 교만이라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쓴 “재난의 원인”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존심과 교만이 가져오는 폐해를 잘 나타낸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명심하고 살아야 할 말씀들을 기록해 주셨는데 그런 말씀 중에 자주자주 반복을 하여 반드시 명심을 하고 살아야 할 중요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순종과 불순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순종을 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순종과 함께 겸손이라는 말씀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1.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오늘 본문 5절 말씀 중에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에 우리 민족은 겸손을 미덕으로 생각하면서 살았던 민족입니다.
그래서 다들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너무 겸손하니까 그 겸손의 미덕이 열등감이 되기도 해서 한 때는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교육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교육 때문인지 좀 잘 살게 되었기 때문인지 언제부터인가 겸손을 미덕으로 삼지 않고 적당한 자기 자랑과 적당한 교만을 좋게 여기기 시작을 했고 요즘은 다 왕자병 공주병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왕자병 공주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사실이 하나님 나라의 왕자요 공주들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좀 거만하게 이 세상을 산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높은 신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고 살기가 힘이 든다고 하더라도 고개 숙이고 살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인이라는 명칭, 영원한 생명, 하나님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이런 시분들을 생각하면 어느 누구에게 뒤질 것도 없고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자신이 있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위대한 신분을 가진 우리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겸손하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한 삶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여기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라고 하신 말씀은 노예들이 주인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앞치마를 두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상기시키는 권면으로(요 13:14-17) 생각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어도 왕처럼 도도하게 사셔도 되실 분이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의 신분을 아셨기 때문에 조금도 남들에게 고개를 숙이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는 참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사셨고 겸손을 몸소 실천하셔서 우리들에게 모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아시고 유월절 전에 제자들과 저녁을 함께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다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도 있을 수 없는 대단한 일이지만 특별히 주님께서 즉 우주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일개 인간의 발을 씻기시는 일을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서로에게 그렇게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몸소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가 겸손하게 서로를 섬기고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더욱이 그렇게 겸손하게 서로 섬기면서 사는 것이 사실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자랑하는 재미로 이 세상을 삽니다.
나는 자랑 같은 것 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잘 보면 은근히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봅니다.

여자들은 자기의 미모를 자랑하려고 많은 돈을 들여서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고 화려한 옷을 사서 입습니다.
왜 그렇게 남의 시선에 관심을 가지는지 이 세상 남자들 다 유혹할 것도 아니면서 외모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면서 삽니다.
자기 자랑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가구들을 들여놓고 사는 것은 물론 편리하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폼을 잡으려고 그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상에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사는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거리가 많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좀 비싸고 맛있는 것 먹고 좀 싸고 맛없는 것 먹는 차이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인생 뭐 별게 있습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도 있고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다만 남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자랑 좀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해야 되는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자랑할 생각하지 말고 남 자랑 들어주면서 살려고 마음먹으면 참 살기가 편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 주려고 생각하면 고생해서 자랑 조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한번 자랑하고 나면 그 대가가 큽니다.
자랑하고 나면 꼭 그 자랑이 이상하게 없어져버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아 나는 건강해 감기한번 안 걸렸어 라고 하면 그렇게 계속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돌아서서 감기가 걸려버립니다.
아 나는 운전을 너무 잘해 나는 무사고야 스티커 한번 안 받았어 라고 하면 사고가 나고 스티커를 받는 경우기 많습니다.

어느 모임에 가면 이모든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로 부족한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참 편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어디 초청을 받아서 가면 맨 하석에 먼저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상석에 앉았다가 쫓겨나는 것 보다는 하석에 앉았다가 상석으로 인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고 겸손하게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자세로 사는 것이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이고 그렇게 실천하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임을 기억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2.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 하라.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능하신 손”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때에 종종 사용되었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서 우리 인생은 참으로 초라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한계가 있고 제한적이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겸손한 삶을 살아야하지만 특별히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하게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내놓을만한 것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수개소리로 하는 말이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한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 이런 말들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은 이런 표현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가끔 성도들은 뭐 좀 좋은 일 하고 폼을 잡습니다.
하나님 나 참 착하지요 나 참 잘했지요 그러니 복을 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당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바르게 착하게 좋은 일 선한 일만 하면서 산다고 해도 그런 것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욥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욥기를 흔히 우리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주제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욥이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신을 깨닫게 된 것이 욥기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을 했고 스스로를 변론하였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 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욥 38-41장) 

그 때서야 욥은 스스로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하나님 앞에서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바르게 알게 되면 욥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이렇게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크게 두 종류의 교회로 나눕니다.
하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인본주의를 중심으로 한 교회가 있고 그와 반대편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본주의의 교회가 있습니다.

인본주의의 교회는 사람을 그 중심에 놓습니다.
사람이 노력하고 사람이 뜻을 세우고 그래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그런 교회의 목적입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고 하지만 그 섬기는 목적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본주의의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제일로 여깁니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받는 행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느끼는 그 행복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면서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고 그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철저하게 후자 즉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른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렇게 신본주의 그것도 가장 그 중심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보다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몰라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또 성경말씀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정말로 바른 길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 진짜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임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때로는 조금 교만하고 자랑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로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 말씀대로 예수님을 믿고 의로운 사람이 되고 천국을 향하여 가는 이 신앙이 진짜 신앙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겁도 없이 자기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해서 인정을 받아 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오늘 본문 5절 말씀 가운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적으로 간주하시고 대적해서 멸망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다고 해도 그 일로 인해서 교만하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교회를 섬기고 수천 수만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라고 해도 그 일로 인해서 자신을 자랑하고 교만하면 그 시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적대관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대로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잘 살펴보면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게 살면 그 자체가 삶에 많은 유익을 얻도록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를 낮추면 사물이 잘 보이고
자세를 낮추면 쉽게 넘어지지 않는 견고한 자세가 됩니다.
자세를 낮추면 이 세상이 참 행복해지고
자세를 낮추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자세를 낮추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잘 보이고 잘 들립니다.
자세를 낮추면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세를 낮추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면 천국을 발견할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자세를 낮추고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무런 공로도 없이 거저 받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엄청난 은혜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사는 자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가 이르면 이 세상이 끝나는 그 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흘린 눈물 우리가 흘린 땀 우리가 당한 고통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서로 상대방을 높이고 서로를 위해서 봉사하는 자세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는 이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때가 이르면 겸손하게 산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