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8.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34)

  본문 : 막 9:9-13

  제목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메시야이신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예수님 오실 당시부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논쟁이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메시야를 아예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한 그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주제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이전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큰 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믿음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목격하기 전에는 아직도 마음속에 풀지 못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풀지 못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의아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물어보기도 하고 또 예수님께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풀지 못한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셨고 그 설명을 통해서 어느 정도 대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의문 사항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문제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그 대답과 의미들을 살펴보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본문 9~10절에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말씀 바로 앞에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하산하는 길에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목격한 세 제자에게 너희들이 변화산에서 본 것을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제자들이 서로에게 물어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이 질문만 가지고는 제자들이 무엇을 알기 원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주석가 핸드릭슨은 본문의 이 질문을 이런 질문이라고 추측해보았습니다. “베드로여 이 말씀이(죽고 산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느뇨?” “요한이여 당신은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느뇨?” “야고보여 주께서 다시 사실 것이면 구태여 죽으실 이유가 무엇이뇨?”라는 질문들이었을 것으로 생각해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죽음이 무엇인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산다는 말씀은 이미 하셨으니까 그것 자체를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다고 하면서 굳이 꼭 죽으셨다가 살아나셔야만 하는 것일까를 궁금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메시야에 대한 생각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왜 꼭 그런 길을 가셔야 하는지를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고 해답을 얻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당시 제자들처럼 이 문제의 해답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가?

  사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다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우리 조상들이 따랐던 유교나 불교도 결국은 사후의 세계를 염두에 둔 종교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자는 종교도 있지만, 그들도 결국은 사후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 이 세상에서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인간의 연구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하시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와 죽음을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구원의 길을 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인생의 죽고 사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책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 있는데 여기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꼭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를 오직 여기에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변질이 되었다고 걱정하는 것은 이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바르게 행복하게 잘 사는 문제에 더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일 죽더라도 오늘까지는 죽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는 날까지 즐겁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뭘 있을지도 모르는 영원한 생명까지 생각하면서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는 목회자들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죄에 대해서 죽음에 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행복해지고 오늘 서로 사랑하며 잘 살자고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노력하여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고 언제까지나 잘살게 된다면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인간은 다 나쁜 짓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또 하루하루 죽어가는 인생입니다.

 

  요즘 뜻깊은 사람들은 잘사는 well being보다 잘 죽는 well dying이 더 중요하다고 말들을 합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이 우리와는 다르겠지만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바르게 잘 사는 것보다 바르게 잘 죽어야 합니다. 잘 죽는다는 것의 핵심은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준비 없이 사는 것은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2)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야 하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신 것은 알겠는데 왜 하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셨다가 다시 사실 필요까지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고 한 질문이 결국 이 문제를 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핸드릭슨의 추측에서 주께서 다시 사실 것이면 구태여 죽으실 이유가 무엇이뇨?”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의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이런 질문을 가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셨을까요? 쉽게 용서해주시거나 아니면 모두 멸망시켜버리고 깨끗한 사람들을 다시 창조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시면 될 것인데 왜 이런 어려운 길을 택하셨을까요?

 

  세상 사람들도 이런 우리의 구원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인간 대신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시고 그래서 그것을 믿으면 부활하고 하는 이런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어낸 옛날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 구원의 길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로 만드신 길이고 그 길에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십자가의 도를 그저 미련한 사람이나 따르는 것으로 생각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의 진리를 믿는 우리를 미련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미련한 사람들은 이 귀한 진리를 몰라보고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더욱 불쌍한 사람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이 십자가의 도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한심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본문 11~13절에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엘리야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서기관들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변화산에 엘리야가 오기는 했지만 잠깐 왔다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엘리야가 메시야 이전에 꼭 와야 하는가를 물어본 것입니다.

 

1) 서기관들의 주장

  서기관들은 성경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에서는 율법학자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늘 하는 일이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는 정말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말라기의 맨 마지막 절인 45~6절의 말씀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5~6)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여기 엘리야를 정말로 성경에 기록된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승천한 그 엘리야가 직접 온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진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온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기관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은 분명합니다. 서기관을 비롯한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애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에 대한 예언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오면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을 상기시키면서 아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오신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살펴보면 그런 뜻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엘리야는 승천한 그 엘리야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엘리야와 같은 특별한 선지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너희에게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칼빈이나 루터 같은 개혁주의자들은 엘리야를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이 재등장할 선지자로 생각해야 된다.”라고 했습니다.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외쳤던 엘리야의 마음을 가진 선지자를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서기관들처럼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 마음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기본적인 믿음이 없으면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저 윤리 도덕이나 가르치며 선한 일 좋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범적인 사람으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으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병이나 고쳐주고 귀신이나 쫓아내는 사람 정도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부인하는 사람은 모두가 거짓 선생이거나 이단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보다 다른 것을 더 많이 가르치거나 강조하는 사람도 역시 거짓 선생이거나 이단일 뿐입니다.

 

2) 예수님의 답변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로 답변을 하셨습니다. 12절에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왜 메시야를 이야기하면서 진짜 메시야에 대한 예언들을 더 중점적으로 살펴보지 않고 엘리야와 같이 예수님을 안내하는 사람의 이야기만 강조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 수 있는 말씀들은 구약성경에 수두룩합니다. 사실 구약성경의 모든 부분이 한마디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라고 했습니다.

 

  조금만 정신을 바로 차리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가 되시는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욕심을 차리기에 바쁜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 아님을 억지로라도 증명하려고만 했지 바르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는 이미 엘리야가 세상에 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3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가 이미 와서 활동하였는데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대우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는 세례 요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회개를 외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외쳤습니다. 그 외침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나와서 세례를 받고 메시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엘리야가 세례 요한을 말하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17장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17:12~13)라고 했습니다.

 

  서기관들은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만 성경의 핵심인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세상 욕심 채우는 데 급급하여 정말로 중요한 진리의 핵심을 고의로 외면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23:15)라고 했습니다.

 

  세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천국 복음을 전하지 않는 오늘날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거나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은 이런 악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변화산의 모습을 목격한 제자들이 하산하면서 그들이 가졌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짧은 인생길에 때로는 잘 살 수도 있고 때로는 못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끝까지 지키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면서 그날을 준비하고 사는 것이 참된 행복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