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형제 삼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히브리서 210~13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 또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이해로는 헤아릴 수가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지혜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지혜 이상이기에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역사는 더욱 오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의도와 목적, 그리고 방법과 과정은 우리의 이해로는 결코 헤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편에서 바라볼 때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어찌 창조주가 피조물과 같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심판의 주이신 하나님이 어떻게 죄의 결과를 당할 수가 있습니까? 어찌 생명이신 분이 그 생명과 정반대인 사망 아래에 놓일 수 있습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의 기준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을까요? 왜 하나님은 꼭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셔야 했을까요? 하나님은 왜 꼭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하셨을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던 자기 백성의 구원이라고 하는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천사보다 우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당하는 죽음의 고난을 완전하게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 고난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목적 가운데 또다른 하나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성도를 자기의 형제로 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면서도, 온 땅의 주인이시면서도 친히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죄와 사망으로 엉망이 되어 있는 우리를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형제로 삼으신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성도를 형제 삼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합당하다(πρέπω)”라는 표현은 어떤 사실에 대하여 마땅히 그러하여 너무나도 당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입니다. 이를 우리가 이해하기 쉬게 번역한다면 그분 때문에 만물이 있고,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곧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와 유사한 고백을 했는데,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고 했습니다(11:36). 이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만물의 창조자요 근원이 되심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ρχηγός)”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의 창시자첫째 가는 자, 개척자, 설립자, 선구자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결국 이 창시자는 남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처음으로 길을 열어주는 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친히 구원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유일한 지도자요, 안내자입니다. 그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14: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도와 안내를 따르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고백하기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했습니다(4:12).

 

 

또한 하나님이 이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창시자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전하다(τελειόω)”라는 것은 의도된바 계획이나 목적을 완전하게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분의 사역, 곧 구속 사역과 관계된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주로서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고난은 필연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해서 반드시 피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고, 히브리서 9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죄인의 피는 자신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성육신하셨다고 할지라도 대속의 피를 흘리는 고난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구원의 주로 온전하게 될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기의 많은 아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본래 아들은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아들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사함받아 구원을 얻은 자들이 누릴 영광입니다. 본래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아들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에게는 고난을 당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들을 위해서 그 아들이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들의 구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은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했었습니다(2:11).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탄생하실 때부터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최고봉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분이 그 고난을 당하심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성도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본문 11절에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의 결과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대속 사역을 통해서 구원하신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고, 죄로 인해 원수가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과 한 가족의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도 부끄러운 존재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 이미 죽었던 우리입니다(2:1). 우리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연약합니다. 아직 우리는 완전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화의 길에 서 있고, 거룩해지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단지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형제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파격적인 일입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한편, 여기의 부끄러워한다(παισχύνομαι)”라는 것은 매우 수치를 느낀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표현인 우크(οκ)”를 사용함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토록 자랑스러워하실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둘이 한 근원에서 났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한 근원은 분명 성부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2:7),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벧후1:4).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차 하나님 나라를 공동으로 상속받을 자들입니다(8:16~17).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누리게 된 특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만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형제라고 불린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흠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형제라고 불리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를 명확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로서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기 위해서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그 예수님을 위해서 나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아까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숨기거나 적당하게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오늘 나에게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838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나 같은 자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시는데,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을 우리가 그분을 부끄러워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이 말씀에 대한 약속(예언)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시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하여 당시의 성도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2절에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라고 했습니다. 이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할 것이며, 내가 회중 앞에서 당신을 찬양할 것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시편 22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는 다윗이 저작한 시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내가는 그 일차적으로는 다윗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또한 내 형제들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교회 곧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회중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6절에서도 예수님은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는 어김없이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무나 자랑스러워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당신의 교회를 구성하게 하십니다. 결국 오늘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 밖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 형제라고 일컬음을 받은 자가 없습니다.

 

 

또한 본문 13절에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 817절의 나는 그를 바라보리라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모두가 하나님께로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할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선지자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3절에 계속해서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사야 818절의 상반절인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을 동일시하는 모습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요한복음 6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76절에서는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 성도를 당신과 동일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당신을 본받는 자 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 형제라고 부르심을 기뻐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무슨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만 하나님께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보증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과 동일시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존재로 보십니다. 비록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해서 자주 넘어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넘어짐을 당신의 넘어짐처럼 여기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나아가 당신께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심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오늘의 우리는 참으로 존귀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귀중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를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그 고난을 통해 구속한 우리를 내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감히 예수 그리스도와 나란히 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그렇게 세우십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자로 세우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못한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따라서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이 신분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귀한 신분을 주시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주님을 부끄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맏형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스러워하며, 그분이 나를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온 땅에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