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히브리서 214~16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만물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보다 못한 자리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는 창세 전부터 가지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타락하고, 멸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들 가운데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얼마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죄악을 간과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죄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을 만드시기로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셨는데, 피조물인 사람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자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의 죄가 다시는 저들을 주관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그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께서는 내 안에 역사하심으로 나로 하여금 들려진 복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나에게 구원이라고 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결국 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해서 관여하고나 공로를 쌓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8~ 9절에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결과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장차 올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토록 놀라운 구원을 얻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기까지는 엄청난 대가가 따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맛보는 정도가 아니라 충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원받을 자기 백성들이 더 이상 그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바로 성도를 형제로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내 형제라고 불러주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쁘게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또 하나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그분께서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성도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성도를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도와 동일한 혈과 육을 지니셨습니다.

 

 

본문 14절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서 그분 자신이 고난을 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들과 동일한 존재가 되어야 저들의 고난을 대신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혈과 육은 영원하신 존재인 하나님과 달리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육체를 살아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증언하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라고 했고(17:11),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라고 하기도 했습니다(17:14).

 

 

그런데 이 피와 육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는 분명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 그 영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수명은 한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아무리 인간의 수명이 100년이라고 말하지만, 그리고 그 날이 길다고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한계가 있고, 언젠가는 그 끝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라고 했습니다. 이를 쉽게 번역하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같이한다, 자녀들은 같은 피와 살을 가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혈과 육을 가진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고 영생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동일합니다. 모두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같은 모양유사하게, 같은 방식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즉 겉모양이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방식이 같다는 의미가 더 큽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은 혈과 육을 취하시는 방식이 우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방법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성령으로 잉태되셨지만,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와 동일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세상에 동일한 모습인 피와 육체를 가진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심으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도 역시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같이 인간의 모든 요소를 가지고 있는 완전한 사람이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셨다라는 것은 함께 나누다, 참여하다, 자신을 ~에 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가지신 유한한 존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피와 살을 가지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가지실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친히 피조물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피와 살에 자신을 결합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피조물과는 완전하게 구별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 되셨고, 피조물의 연약함을 감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일체의 일들에 스스로 참여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같은 인간들이 타고난 죄까지도 함께 타고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4:15). 그분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죄와는 전혀 무관하신 분이지만, 혈과 육에 스스로 참여하셨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나와 같은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만약에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과 육에 참여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죄인들의 구원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로 남고 말았을 것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성도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혈과 육을 취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혁와 육을 취하심도 놀라운 일인데, 그분이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향하는 목적을 본문에서 두 가지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통해서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4절에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무력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요한일서 3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귀를 멸하는 일이 성육신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곧 대속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에게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죽음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멸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사실 죽음은 죄에 대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죄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사탄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죄가 없는데 죽을 수가 있는가?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죽음의 권세 아래 붙들고 있었던 사탄의 계략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인들을 정죄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원수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로 신분이 바뀌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기에서 마귀를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세력을 잡은 자주권을 가지고 있는 자, 즉 손에 쥐고 제 마음대로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사에 대한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39절에서 하나님은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마귀가 죽음의 세력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마귀가 죽음의 원인인 죄의 주인이며, 마귀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기에 죄와 죽음의 영역을 마귀에게 속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은 사망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마귀는 더 이상 이전의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곧 성도는 마귀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진 위대한 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과거 예수 밖에 있었을 때는 마귀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마귀를 충분히 대적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한다면, 마귀는 우리를 피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4:7).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누리는 영광입니다.

 

 

둘째는 죽음을 통해서 죽음에 얽매인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놓아준다라는 것은 자유의 몸이 되게 한다, 해방시킨다, 또는 구해낸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은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구원(救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을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5:1), 죄와 사망에서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8:1). 이 자유를 소유한 성도는 사망이 주관하지 못합니다. 나아가 마귀의 권세 또한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가 구원을 받기 전의 상태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라고 했습니다. 이를 원문을 따라 번역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해 평생 동안 종살이하고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저들의 현실은 어둡고 캄캄한 흑암이요, 절망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있는 모든 날 동안 계속해서 그 현실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여기의 죽음은 단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생물학적인 죽음만이 아닙니다. 장차 주님 앞에서 받을 최후의 심판과 그 이후에 있을 둘째 사망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지 못하는 자,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는 그 죽음의 공포 때문에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이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는 데서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과 대속의 죽음으로 그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구원의 대상은 천사가 아닌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본문 16절에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서 천사보다 더 낮은 자리에까지 낮아지셔야만 하셨는가?”라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천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곧 성도를 위함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붙들어준다라는 표현은 도와준다(help)’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 곧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고,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친히 성육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특히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에 집중해야 합니다. 여기의 자손(σπέρμα)”은 본래 (seed)”를 가리킵니다. 이 표현이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창세기 2217절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의 씨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직 혈통적인 자손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편협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 약속은 혈통적인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약에서도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를 말씀하십니다. 특히 이사야 1925절에서는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나의 기업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애굽이나 앗수르나 이스라엘을 같은 선상에 놓고 똑같이 취급하십니다. 저들의 혈통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이나 민족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건너오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은 신약에서 아주 귀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향해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9:9).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함으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율법이나 혈통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임을 선포했습니다(3:7). 그리고 이러한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약속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3:29).

 

 

결국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믿음을 따라 되어지는 영적인 것입니다. 장차 완성 되어질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단지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길 가에 버려진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3:8).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이나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영적인 후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 할 믿음의 사람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형제라고 일컬음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혈과 육을 가지셨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神性)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모든 일들을 친히 겪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함께하시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인류를 종으로 삼았던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귀는 이 죄와 죽음으로 우리를 정죄하고 얽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마귀로부터,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위해서도 아니요, 혈통을 따른 이스라엘을 위함도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천사보다 더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 구원을 선물로 얻게 하셨습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고, 그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왕노릇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더욱 견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더 뜨거워지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한 우리의 헌신이 더 열정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차 우리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날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