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히브리서 217~18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기 위해서 성육신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밝히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당시의 성도들이 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그 고난을 피하는 방법으로 예수를 버리고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참모습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견고해지고, 그 예수를 끝까지 바라보게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믿음으로 성도들도 그 승리에 동참하기까지 인내하게 합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진리를 떠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5). 오늘날 지식이 풍성해지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막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조차도 세상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을 추구하며, 세상의 논리를 따라서, 예수를 버리고 있습니다. 비록 예수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음에 이르는 환난이나 박해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보다 예수를 향한 믿음을 지키기에는 더 어려운 시대가 바로 오늘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예수를 떠나가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향한 시선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영원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금까지 해 왔던 내용의 반복일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모든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친히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그분이 오늘도 나를 도와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붙잡음으로 복음과 진리를 떠나 방황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모든 면에서 성도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본문 17절에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땅하다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가지는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보좌를 비우시고 천사보다 낮은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창조주이시면서도 피조물의 세계로 들어오심은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분의 성육신은 자기 백성 구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 성취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의 의무를 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치 의무를 진 자처럼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육신은 강제나 억지가 아니라 기쁨으로 행하신 역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또한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류 구원이라고 하는 성부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따라 자신에게 부과된 성육신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와 같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같이 된다라는 것은 ‘~와 같게 만든다, 유사하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 특히 예수님의 비유에서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를 드시면서 마치 천국은 ~과 같으니라고 하실 때 주로 사용하셨습니다(13:24, 7:31). 하지만 때때로 이 표현은 본받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고(6:8),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이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형상을 취하셨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까지도 동일하게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하셨습니다, 배고프셨습니다. 슬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매를 맞으면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생애에서 느끼신 감정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고난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모두 함께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비록 그분 안에 우리와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는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와 상관이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당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을 당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나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당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존재였다면 결단코 우리의 대속주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친히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우리의 아픔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분이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본문 17절에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은 누가 뭐라 해도 자기 백성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구속자의 모습을 대제사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은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이 대제사장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자에 대해서 그리 좋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직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대제사장은 출애굽의 지도자였던 아론이었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고, 아론의 혈통 안에서 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대제사장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직분입니다. 대제사장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은 그 짐승의 피를 보시고 그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결국 대제사장이 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기 피를 제물로 삼으신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완전하게 도말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저들의 모든 죄를 덮었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저들의 죄를 간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을 의롭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심은 바로 이 대제사장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전의 다른 대제사장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분문에서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비하신(λεήμων) 대제사장입니다.

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향하여 한없는 동정을 나타내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죄인으로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형벌의 대상이 아닌 치유가 필요한 병든 자로 보십니다. 마태복음 912~13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서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잃어버린 자로 보십니다. 누가복음 19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동정심,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동정심이 죄인이 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실하신(πιστός) 대제사장입니다.

이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신뢰할 만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자신의 직무에 신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믿음직한 아들이셨습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과 이적들을 통해서 당신이 참된 목자이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의지할 수 있는 주가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유한한 인간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하나이시기에 아버지의 뜻을 온전하게 아셨고,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가장 완전한 길로 인도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성경의 역사에 나타난 인간 대제사장들은 비록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저들은 분명한 한계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자신도 죄인이었고, 자신을 위해서 짐승을 죽여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셨고, 자신을 위해서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 되셨을까요? 본문은 이에 대해서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속량(λάσκομαι)”은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는 구속의 개념보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고 죄인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국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감당하심으로, 죄인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나지 않게 하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시험받는 성도를 돕는 자가 되셨습니다.

 

 

본문 18절에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구절입니다. 즉 그분은 우리와 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시험(πειράζω)”test가 아니라 temptation(유혹)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는 전부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라는 유혹, 사탄에게 굴복하라는 유혹, 육체의 고통을 피하라는 유혹이 끊임없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심으로 이기셨습니다. 끝내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성취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시험 받으심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시험을 받는 것과 동일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시험 앞에서 다른 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 시험 앞에서 많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치고 노력해도 시험 앞에서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수시로 넘어지고 그릇된 길로 갑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시험 가운데서도 죄를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시험을 받지 않으실 수도 있는 분이시지만, 그 시험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시험을 당당하게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친히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의 도우실 수 있느니라라는 표현은 위험에 빠진 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도와주기 위해서 급히 달려가는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이 표현은 가나안 여인이 흉악한 귀신 들린 딸로 인해 예수님 앞에 와서 도와달라고 간청할 때 사용되었고(15:25),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16:9).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모든 시험을 받으셨고 그 시험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시험을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각한 시험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다면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와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은 유혹과 시련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우리 앞에 온갖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에 대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고 했습니다(벧전 4:12). 심지어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라고 했습니다(1:2).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 시험 앞에서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시험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자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를 그 어떤 시험 앞에서도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가 시험당할 때 도우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기에 자기 피를 제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가 시험당할 때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시험 앞에서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믿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날마다 그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 예수님을 찬양하며, 그 예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