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
히브리서 3장 12~14절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도 여러분! 오늘 분문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앞에서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시험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 즉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사도는 당시의 성도들에게 과거 조상들이 범했던 그 불신앙의 오류를 기억하고 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조상들이 맞이한 결과는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이 당하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 과거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에는 긍정적인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인 모습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긍정적인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욱 강한 믿음과 소망을 북돋아 줍니다. 때로는 부정적인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게 하고 바른 자세를 갖추도록 합니다.
이제 사도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자들, 특히 그러한 약한 자들을 품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권면합니다. 이는 교회가,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에 동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들을 다른 표현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자, 함께 가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공동 상속자,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롬8:17).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이 여기에 참여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조심할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힘으로 우리가 이러한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라고 하는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복음을 가진 자로서,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조심하고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불신의 악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먼저 사도는 아주 강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너희는 삼가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라고 하는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또한 이는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 편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과거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을 남의 일처럼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오늘 우리에게 같은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가 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저들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삼가 주의하고 조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지 않는다(ἀπιστία)”라는 것은 ‘신실하지 않음, 불신앙 혹은 신앙의 결핍’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에서 수행원으로나 건축자로서 “신실했다(πιστός)”라는 것과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특히 이 표현이 하나님 앞에서 사용될 때는 지극히 악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러한 믿지 않음을 가리켜 ‘마치 살아 계신 하나님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영혼을 끊어버리는 면도칼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마음(καρδία πονηρὰ)”은 ‘나쁜 마음, 가치가 없는 마음, 타락한 마음’이라는 뜻을 가진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살후3:2).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이 충분히 악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5:19). 야고보 사도도 인간의 악한 생각이 판단을 그르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약2:4). 또한 사도 요한은 복음을 거스르는 모든 일들은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요이1:11).
결국 “믿지 않음”이나 “악한 마음”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은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불신앙과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악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앙과 악한 마음을 품는 자가 맞이하는 결과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짐”이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떨어진다(ἀφίστημι)”라는 것은, 마치 나무의 가지가 원줄기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저들에게는 열매도 없습니다. 저들에게는 영원한 사망과 멸망만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지금 사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마음을 품는 것은 곧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배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이 일만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로 인해서 실망하는 일이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거부하거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이를 가장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거룩한 공동체 안에 있지만, 때때로 내가 원하지 않는 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지라도 우리의 믿음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결과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귀함과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Ⅱ.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했습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와 같은 질병들은 바로 인간의 고립된 삶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지 못하면 삶의 질 또한 급격하게 떨어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분명 신앙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인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만으로는 교회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한 사람만으로 교회가 유지될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같은 믿음과 같은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믿음 공동체입니다.
이제 사도는 성도가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믿음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권면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피차 권면하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권면하라(παρακαλεῖτε)”라는 표현은 명령형으로 지속적인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곁에’라는 단어와 ‘부르다’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문자적인 의미는 ‘곁에 부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위로하다, 권면하다, 청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는 이 단어가 성도들이 늘 가까이에서 교제하며, 권면함으로 대열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들끼리의 친밀한 교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권면은 바로 “오늘(Σήμερον)”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오늘은 과거나 미래와는 구분되는 배타적인 시간 개념을 나타내는데, 절대적인 시간 혹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사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와는 이미 상관이 없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불확실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나에게 주어질지 아니면 주어지지 않을지 아무도 모르는 시간입니다. 오직 오늘만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시간입니다. 오늘만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시간입니다(고후6:2). 오늘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시간, 즉 믿음의 시간입니다. 오늘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시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오늘 권면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미 흔들려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다시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권면해야 합니다. 서로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서로를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 공동체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권면의 목적은 죄의 유혹으로 인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완고하게 된다(σκληρύνω)”라는 것은 ‘굳어지게 된다, 딱딱하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가 경고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된 경우는 애굽의 왕 바로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바로의 마음이 완고해짐으로 모세를 통해 전달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출7:13). 또한 이 단어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데에서 돌아서서 금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바로 완고하게 된 모습입니다(출32:9). 그리고 저들은 광야 40년 동안 그 완고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이러한 완고함의 결과, 애굽은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으로 망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형제들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서로가 매일 권면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실 죄의 유혹은 강력합니다. 죄의 유혹은 사람의 정욕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와 쉽게 타협하고 가까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은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특히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사람은 더욱 쉽게 죄의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권면하는 일은 형제들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최선의 예방책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의 성도들은 서로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주장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활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요13:34).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권면이 지속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깊은 관심과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 혼자만 신앙생활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분명한 신앙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서로를 권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서로를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서로를 굳게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낙오자가 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Ⅲ.처음 확신한 것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순수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순수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신앙에서 자꾸만 그 순수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온갖 더러움이 섞여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순수함은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순수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본문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작할 때 가졌던 그 순수한 확신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디모데전서 5장 12절에서 말씀한 처음 믿음,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듣고 받아들였을 때 가졌던 그 확고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접했을 때, 우리는 그 복음에 다른 것을 섞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복음의 핵심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것만을 믿고 우리가 구원을 얻었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순수한 열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 죄의 유혹을 대항하여 싸운다고 했지만 처음 믿음은 약해졌고 흐려졌습니다. 더 심하게는 그 믿음을 잃어버리는 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는 처음 믿었던 그 믿음을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처음 가졌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굳게 잡으라고 권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자 한다면 이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에서 흔들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만이, 그 사랑만이, 그 소망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자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은 순수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순수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할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순수합니까? 나아가 이러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확고합니까? 날마다 공격해 오는 죄의 유혹 앞에서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 들었던 그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 받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영원히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믿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그 날을 기다리면 오늘이라고 하는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신앙의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매일 서로를 권면해야 합니다.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함께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리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왕 노릇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처음 가졌던 복음과 믿음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 때의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의 모습을 지키는 일입니다.
원하기는 광성의 성도들은 이 혼탁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굳게 세움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