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4. 27. 광성교회 주일 낮 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77)
본문 : 막 14:50-52
제목 :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초등학교 아이들이 보는 책 가운데 “내 멋대로 ㅇㅇ 뽑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 멋대로 아빠 뽑기, 내 멋대로 선생님 뽑기, 내 멋대로 친구 뽑기, 내 멋대로 나 뽑기...
저도 내 멋대로 내 마음에 드는 아버지를 한번 뽑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 멋대로 아빠 뽑기”라는 책을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이 아이도 저처럼 지금보다 멋진 아버지를 갖고 싶 었던 모양입니다. 영화배우처럼 멋쟁이 아빠도 뽑아 보고 힘이 좋은 근육질의 아빠도 뽑아 보고 돈 많은 사장 아빠도 뽑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완벽한 아빠는 없더라고 했습니다. 어느 하나가 좋으면 그 뒤에 좋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아서 아무리 좋은 아빠를 골라도 만족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부족해 보여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지금 아빠가 좋은 아빠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작가는 이렇게 글을 마감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완벽한 아빠는 없습니다. 소중한 아빠만 있지요, 여러분에게 소중한 아빠가 곁에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꼭 안아 드리세요. 마음을 다해서요”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뽑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뽑으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뽑으셨다면 좀 더 멋있고 좀 더 잘나고 똑똑하고 착한 사람을 뽑으시지 이렇게 시원치 않은 나 같은 것을 뽑으셨을까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누구의 간섭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그런 완벽한 분이 왜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들을 그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뽑으셨을까요? 아마도 그 누구를 뽑아도 완벽한 인간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간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직접 뽑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라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신데 왜 이런 배반자들을 제자로 뽑으셨을까요? 목숨 걸고 예수님을 지킬 의리 있는 사람을 뽑지 않으시고 이렇게 버리고 도망이나 갈 사람들을 제자라고 뽑으셨을까요? 그래도 뭔가 좀 다른 사람이라서 뽑으셨겠지만, 누구를 뽑아도 결국은 다 마찬가지로 연약한 인간이고 어려움을 당하면 배반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회복시켜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벽해서 뽑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교적 못난 사람들을 뽑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완벽한 삶을 요구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다 아시고 뽑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엄청난 지위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으면 됩니다. 우리에게 맡겨준 귀한 사명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으면 됩니다.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오늘 본문 말씀 짧으니까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예언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돈 욕심을 내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것은 악한 일이고 배반자나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배반자가 아닙니다. 무서워서 도망갔고 그것도 일시적이었고 나중에 다 돌아왔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런 목숨을 위협받는 자리에 처하면 우선 피하고 도망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망간 이야기는 당연히 기록해서 후세의 우리가 교훈을 받아야 하겠지만 한 청년의 이야기는 왜 기록을 했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홑이불을 두르고 있다가 붙잡히니까 버리고 알몸으로 도망갔다는 창피한 이야기를 왜 기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청년이 누구일까 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마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청년을 마가라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 오시기 이전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고 성찬 예식도 제정하시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감람산으로 가셨는데 잠시 예수님 일행을 떠났던 가룟 유다가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는데 예수님이 아직 다락방에 계신 줄 알고 거기에 와서 찾았으나 안 계시기 때문에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그 다락방 주인의 아들이었던 마가가 그 집에서 잠자고 있었는데 이것을 알고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기 위해서 옷을 입을 사이도 없이 그냥 겟세마네로 달려갔는데 이미 예수님은 붙잡히셨고 자신도 붙잡히게 되자 두르고 있던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별로 유익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창피를 무릎 쓰고 기록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라고만 기록해도 될 것인데 자신의 창피한 이야기를 기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목적 없이 이 이야기는 자신이 현장에서 목격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자신이 그 역사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함으로 이 이야기가 역사의 기록임을 알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비록 일시적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자신은 곤경에 빠진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서 옷 입을 시간도 없이 달려왔음을 이야기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 편이 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도망가는 사람이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미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을 때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막 1:18)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도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 1:20)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먹고살기 위한 도구인 그물과 배도 버렸고 심지어 아버지와 일꾼들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시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니까 예수님도 버리고 도망을 하였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일시적으로 그 자리를 피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셔서 복음의 진리를 알게 해주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까지 바쳐서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완벽하지 못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망갈 연약한 비겁자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우리가 선 자리가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다 잘 알게 되면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제자들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간 것을 “버리고 도망갔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마가라고 생각되는 청년은 최소한 자신의 수치를 가려줄 비싼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버릴 것이 있고 죽어도 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이들이 버린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우리 예수님 보다 더 귀한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TV에 보니까 어떤 인간이 자기가 창조주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냥 자기가 창조주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허황한 말을 해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참 이상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신다는 것은 수천 년에 걸쳐서 기록된 성경에 아주 자세하게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성경에 기록했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신 것이나 행하신 많은 일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것도 날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아주심으로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 용서함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불가능한 이 일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단번에 죄인의 신분에서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는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존귀한 예수님을 버리고 떠납니다. 많은 사람이 이 구원의 복음을 버리고 엉뚱한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복음보다 다른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구원의 복음과 반대되는 것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예수님보다 세상을 좋아하고 떠나는 사람들이야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이고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뽑지 않았는데 가족 따라 친구 따라 한번 와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구원의 복음보다 다른 것을 믿고 따르려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있기는 하지만 복음의 진리를 모르고 엉뚱한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위장 취업한 가짜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들어온 삯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우리를 엉뚱한 길로 인도하는 아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알면서도 그렇게 나쁜 짓을 하는 아주 악한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를 모르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르고 따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가끔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사람이 자신이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기적도 좀 체험하고 기도해서 성공적인 삶도 좀 살아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좋은 일도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냥 대강 교회만 다녀서 자신이 진짜 신자인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제가 “위대한 믿음 진실한 고백”을 외치고 다니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위대한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러면 진실한 고백은 어떤 것이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실한 고백은 믿음을 뒷받침하는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똑바르게 살아야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해야 믿음의 고백이 진실한 고백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 생각하면 믿음으로 구원이 아니라 행함으로의 구원이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가 좋은 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직 믿음”의 소중한 교리를 떠납니다.
제가 간단하게 진실한 고백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간단하게 몇 가지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진실한 고백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시고 복음의 기초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항상 그 예수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말씀 편에 서서 그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평생 고기만 잡던 베드로의 상식으로서는 깊은 곳에는 그물을 내려봤자 헛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즈음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똑똑해져서 온갖 이론들을 만듭니다. 그럴듯한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다가 A.I.라는 인공지능이라는 것이 나와서 엄청난 것을 만들어냅니다.
인공지능으로 글도 쓰고 노래도 만들고 그림도 그립니다. 사진이나 영상도 합성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게 가짜를 만듭니다. 유튜브에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옳은지 헷갈리게 하는 이야기들을 수없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는 것입니다. 더 좁혀서 예수님의 말씀 편에 서는 것입니다. 더 집약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한 고백을 하게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복음과 반대되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반대되는 편에 서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고 좋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영원한 생명을 알고 믿지만 무엇이 소중하냐고 할 때 이 세상의 삶이 더 소중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이 세상보다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도 이 세상의 삶을 무시하거나 포기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더 소중하냐고 할 때 서슴지 않고 영원한 생명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일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시자 다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하면서 영원한 말씀을 따랐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 세상의 행복을 따르느냐 비록 육신의 삶이 고생스럽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따르느냐고 할 때 영원한 생명의 편에 서는 것이 진실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편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나 선지자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 사도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고 이것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신앙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 위에 천국 열쇠를 가진 교회가 세워지고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여러 가지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예수님을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 믿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4) 예수님을 이 세상 사람보다 더 사랑하는 편에 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베드로 사도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대답하기를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실한 고백이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예수님의 편에 서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가장 가까운 부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도 우리가 챙겨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돈도 있어야 하고 명예도 있어야 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진실한 고백을 따르는 일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우리가 그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에는 이렇게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님을 받았을 때 비로소 순교에 이르도록 예수님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님 편에 서서 살게 된 것은 성령님의 특별하신 역사하심을 따라서 이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있도록 우리를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진실한 고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부활과 영생의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버리고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늘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신 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