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1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53)
본문 : 요일 4:17
제목 : 온전한 사랑.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을 주제로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이런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있는 요한일서의 말씀이 계속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사랑하면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는지를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특별히 가정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부부간에는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 대한 참된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부부간에 진실 된 사랑을 하지 못한 가장들이 나이가 들면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하고 이혼을 당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에 가면 별 볼일이 없게 된 50대 남편을 “오찌 누레바“ - ”비에 젖은 낙엽“이라고 한답니다.
아스팔트 위에 비에 젖어서 착 달라붙어서 빗자루로 쓸어도 쓸리지 않고 붙어 있는 낙엽의 모습이 마치 마누라 치맛자락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남편 같다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어서 마누라 눈치나 보고 있다가 이사라도 가면 집에 키우는 강아지 품에 안고 운전사 옆 자리에 얼른 올라앉아야 되는 서글픈 사람이 젖은 낙엽의 남편이랍니다.
어떤 남편은 이사 갈 때 집에 키우는 개가 없어서 얼른 냉장고 속에 들어갔답니다.
냉장고는 설마 버리고 가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문을 열고 보니 중고냉장고 파는 곳에 와 있더랍니다.

50대 중년부인들에게 필요한 것 네 가지와 불필요한 것 한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필요한 것은 돈, 건강, 친구, 딸이고
불필요한 것 한 가지는 남편이라고 합니다.
50대 중년 남자들에게도 필요한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아내, 부인, 집사람, 마누라라고 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일만 했던 남자들의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참 사랑이 무엇인줄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을 할 줄 모르고 그저 외형적으로 교회 예배에 출석이나 하고 헌금이나 하고 봉사나 하는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젖은 낙엽이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참 사랑이 무엇인줄을 알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았는가? 그렇지 못했는가를 알아보는 간단한 시험이 있다고 합니다.
싸늘한 분위기 가운데 있다가 내가 들어가면 분위기가 살아나고 웃음꽃이 피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내가 나가면 분위기가 살아나고 웃음꽃이 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경우 중에 내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고 살았는가? 그렇지 못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전화를 하면 사람들이 받기를 싫어하고
내가 나타나면 조용하다 못해 싸늘해지고
나를 쓸어내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이 있는 젖은 낙엽신세는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신적인 삶에도 영적인 삶에도 그런 비참한 신세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참된 사랑이 무엇인 줄 알고 그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함으로 하나님께 더 사랑을 받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주제는 “온전한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 혹은 “성숙한 사랑”이라는 말로 이해를 하셔도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온전히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랑이 무엇인지 그 온전한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1. 온전한 사랑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줄 알기 위해서 본문의 “이로써”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로써“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앞 절 16절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16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아는 것이 온전한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그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실천하는 것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나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넓은 의미에서 “이로써”라는 말은 4장 7절 이하에 계속해서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고 섬겨야 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면 믿음도 바른 믿음이 되지 못하고 섬기는 섬김도 바른 섬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가장 핵심적으로 알아야 할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바르게 믿지 못하면 그것은 신앙의 초보의 길도 들어서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잘 7-8절 말씀에 보면 
사랑이 무엇인줄 알고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10절에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9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10절).

하나님의 사랑을 다 말씀을 드리려고 하면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 /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늘을 두루마리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찬송가 404장)

신앙이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고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 서면 내가 엄청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 앞에 서면 그런 엄청난 죄인을 그토록 사랑해 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면 그 사랑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감격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그 사랑에 감사해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믿음생활입니다.

2)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11절 말씀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필수로 마땅히 반드시 꼭 해야 할 일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신앙생활을 형식적인 종교적 의식에 한정을 하려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를 많이 드리고,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만 계산을 합니다.

물론 그런 행위들이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사랑에 기초하지 않고 외형적으로 그저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도 드리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도 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바르게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우리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도 온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온전한 사랑이 우리 삶의 제일 큰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온전한 사랑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해줍니다.
우리의 삶은 반드시 그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이 세상 사람들도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면 나이가 들어 비에 젖은 낙엽처럼 취급을 받습니다.

아내도 나를 싫어하고 자식도 나를 싫어하고 이웃도 나를 싫어합니다.
인생 더럽게 살았다고 흉을 보기도 하고 비웃기도 합니다.

내 딴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가족들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취급을 해버립니다.
내 딴엔 바르게 산다고 살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지를 않습니다.

다른 것 다 잘해도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지 않고 살면 이런 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사랑이 없는 사람을 높게 평가해 주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넘어가면 됩니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일이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잘 평가해 주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깎아 내려서 자기가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이 하면 불륜이요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칭찬을 받겠습니까?
포기하면 그만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나쁘게 말한다고 나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간 모든 사람들은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재수도 없고 다시 만회할 기회도 없는 것이 최후의 심판입니다.
여기서 한번 불합격 하면 다시 회생을 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냥 그 판결대로 처분을 받을 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심판의 날에 심판대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비결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때 자신 있게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심판을 받으러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사랑이 온전하게 이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고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는 것이 심판 날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랑이 있는가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가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아서 저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면 그저 얼른 보아도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지 아직도 미움을 가지고 사는지를 바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목사님 지금까지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시고 오늘은 사랑이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반문을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믿음이 있다는 말과 사랑이 있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사랑 안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말과 사랑이 있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고
참된 사랑을 하는 자는 그 속에 믿음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됩니다.
나는 믿음이 있는데 사랑이 없다. 라는 말은 잘 못된 말입니다.

야고보서 2: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행함이란 사랑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사랑을 행하지 않는 것은 그 믿음에 이상이 있다는 것이요 심지어는 죽은 믿음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믿음에는 사랑이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사랑을 행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나타난 사랑이 온전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목사가 지옥이 있다 심판이 있다. 라고 말씀을 전하면 아이고 목사가 또 공갈을 치네 라고 합니다.
있는 줄 알기는 아는데 아침부터 기분 나쁘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잘한다, 복 받으라, 그런 축복만 하시지 지옥이니 심판이니 그런 기분 나쁜 소리는 하지 마시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이런 말 한다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최후의 심판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해서 이런 설교를 합니다.

만일 이런 설교를 듣지 않고 막상 죽어서 또는 종말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섰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오장육보가 떨려서 부들부들 떠느라고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오늘 이 설교를 들은 사람은 아 하나님께서 우리가 삼판대 앞에 담대함을 가지게 해 주시려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사랑을 행하면서 살게 하셨구나. 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아 나는 믿음을 가지긴 했지만 사랑을 행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어떻게 하지라고 걱정을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 온전히 우리에게 임하게 된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 부족해도 우리의 사랑은 온전히 다 이루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하심이 나의 삶에 온전히 임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판대 앞에서 우리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 사랑을 알고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 하면서 살려고 한 작은 우리의 노력이 큰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온전한 사랑이 우리를 예수님처럼 행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쉬운 성경과 우리말 성경에서 각각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되면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행하기 때문입니다.”(우리말 성경)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전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아무 두려움 없이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쉬운 성경)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고 또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행하게 되고 예수님과 같아진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우리도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신과 같이,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과 같이 우리도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마음을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예수님처럼 행동을 할 수야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예수님과 그 삶이 같아지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역사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똑같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추구하는 바가 그 정신이 그 목표가 같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정말로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해 주셨고 별 볼일이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셨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마음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멸망 길로 달려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깝게 여기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져할 마음이 예수님 마음에 있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 것입니다.

맹자라는 사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족 간에 부부간에 성도 간에 가져야 할 가장 귀한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보면 다 불쌍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 하나 내 뜻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일 뿐입니다.
우리는 같이 늙어가고 같이 병들어가고 같이 죽어가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서로를 불쌍히 여기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요 참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온전히 우리의 삶에 나타날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되고 이 세상의 삶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이, 우리의 헌신이, 불쌍히 여김이, 사랑이, 헛되지 않아서 우리로 그 무서운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서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