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3. 3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요일54)
본문 : 요일 4:18
제목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평생 집을 짓는 건설회사에서 일을 한 한 목수가 있었습니다.
나이도 들고 해서 이제 그만 은퇴를 하고 쉬려고 마음을 먹고 그 회사 사장님에게 사표를 제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장님이 목수에게 마지막으로 집 한 채만 더 지어주고 은퇴를 하라고 권유를 했습니다.
사장의 부탁인데 거절을 할 수는 없고 집을 한 채 더 지어주고 은퇴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을 그만 두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가 되어서인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대강 적당히 어영부영 집을 지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강 적당히 지은 집이 좋은 집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부실공사로 겨우 겉모습만 집일뿐인 그런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집을 완성하고 나서 목수는 사장님에게 그 집의 현관 키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그 현관 키를 다시 목수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이 집을 당신에게 선물합니다. 여생을 이곳에서 편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목수는 쇼크를 받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이 집이 내가 살 집이 될 줄 알았다면 그렇게 부실공사를 하지 않았을 것인데.
내 집을 짓는 줄 알았다면 정말로 최선을 다해 튼튼한 집을 멋있게 지었을 것인데.
후회를 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모든 삶은 내 자신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하는 모든 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가 하는 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집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하루하루는 영원한 천국에서의 집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은 기둥을 세우고 또 오늘은 벽을 만들고 그리고 구석구석 하나하나 집을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의 삶을 집을 짓는 것과 많이 비교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를 비교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장에는 집을 짓는 자가 어떤 공력으로 짓는가에 따라서 상을 받고 해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라고 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은 쉽고 좋은 일이지만 남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고 재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 일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 목수의 이야기는 이런 말로 끝을 맺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일에는 죽을힘을 다하지만 정말로 자신에게 필요한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는 그 사랑으로 인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에서 온전한 사랑이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그런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쉬운 성경에서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마음 때문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두려움이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아니라 죄인이나 노예가 가지는 공포심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죄인들이 갖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이 세상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벌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늘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고, 그냥 하루하루 즐겁게 살려고만 합니다. 

그렇지만 조금만이라도 제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지은 죄들에 대해서 어떤 모양이든지 그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라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보다 더 양심적으로 살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삽니까?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려고 한다면 아직 무엇인가 잘 못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야 교회에 가! 교회 안가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
야 그렇게 해가지고 복을 받겠냐?
야 거짓말 하고 나쁜 짓하면 지옥 간다.
이런 하나님께 불충성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초보 신앙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을 확실히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안 사람이든지 모르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이든지 핑계를 대지 못하고 누구든지 그 행한 행위대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아무 일없이 지나간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누구든지 그 행한 악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잘 한 것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해도 그들이 지은 죄로 인한 벌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정죄할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어도 그 죄는 이미 다 용서를 받은 것이고 우리의 심판은 우리가 한 작은 선한 일이라도 그 일에 대해서 충분한 상을 받는 일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고 웃고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은근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 괴로워하고 한숨을 지으면서 우울증에 빠지고 마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살아도 되는 우리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2.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쉬운 성경에서는 “그러므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움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아직 온전한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니까 그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철저하게 계획되어 있고 계산되어 있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조직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그 사랑에 바르게 반응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교회의 권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장례식을 하는데 목사님이 아 우리 권사님 이제 천국에서 편히 쉬실 것입니다. 라고 설교를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권사님이 천국을 가셨는지 지옥을 가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잘 되어서 나중에 천국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광경을 목격한 다른 교회 목사님이 아 그 권사님이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신앙에서 이탈하는 큰 죄를 지었나보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권사님은 세상에 있을 때 많은 충성을 한 권사님이고 한 번도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귀한 권사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교리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렇게 충성을 하고서도 천국에 갔는지 안 갔는지 조차도 알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교회에 다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를 선택해주셨음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선택을 해 주셨기 때문에 나는 특별한 사람임을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한 줄로 알고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냥 아무 일도 안하고 믿는다고 의로운 사람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선한 일을 한 일도 없이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를 하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안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확고부동한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알고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온전한 사랑으로 인해서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온전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다분히 계산적이거나 형식적인 사랑이 많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최고의 표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예배가 형식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형식적이라는 말입니다.
찬양이 형식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형식적이라는 말입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와서 아무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돌아간다면 차라리 오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뭘 잘 모르니까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하고 이해를 하지만 그것이 버릇이 되어서 계속해서 그렇게 성의 없이 예배에 참석을 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외부 목사님들이 오셔서 설교를 가끔 하셨습니다.
외부의 목사님들이 오실 때마다 성도들이 지적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픕니다.
예배 시간에 이야기를 하다가 지적을 당하기도 하고 예배 시간에 핸드폰을 만지다가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여기 앞에서 보면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모습들이 잘 보입니다.
어떤 분은 두리번거리고 어떤 분들은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낙서를 하고 어떤 사람은 딴 생각을 하고 어떤 사람은 졸고 어떤 사람은 아예 잠을 잡니다.

저는 이해를 합니다.
피곤하게들 사시니까 예배 시간에는 졸음이 올 것입니다.
복잡하게 사시니까 혹 전화 한통 안 받으면 손해가 날까봐 예배시간에 전화도 끄지 못하고 진동으로 해 두고 혹시나 하고 살피게 될 것입니다.

만날 똑같은 설교 뭘 들을 것이 있겠습니까?
재미도 없고 웃기지도 않고 뭐 특별하게 새로운 것도 없고 하니까 집중해서 듣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저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니까 그것이 예배를 드리는 일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에 소홀히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물론 옛날 목사님들처럼 예배시간에 부채질을 해서도 안 된다, 옷을 정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리를 꼬고 앉거나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외형적인 것 보다는 중요한 것이 우리의 마음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집중하고 정성을 다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사람들은 욕심이 많아서 자기를 위해서 자기중심으로 삽니다.
지나친 이기주의자들은 결국 혼자서 이 세상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도 받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고 사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사는가를 점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3.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온전한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는 노력해도 온전한 사랑을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런 온전한 사랑을 우리는 따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할 뿐이지 완전하게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참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참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점잖은 모습으로 앉아있지만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이 죄악들을 생각하면 참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참 부끄럽습니다.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이 참 알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말뿐이지 실속이 없습니다.
말이라도 잘 하자고 했더니 말만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밥이라도 한 그릇 사 주면 좀 나아보이지만 그까짓 밥 한 그릇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지만 그 어려운 일들을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나 하나 살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남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만날 사랑한다. 사랑하자. 말만 하면서 별로 실천을 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하나님 앞에 가서 칭찬받기란 영 틀린 것 같습니다.
혼이 날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 쫓겨나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두려움을 내어 쫓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완전하게 사랑을 하시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그렇게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 속에 있는 이 작은 사랑을 위한 몸부림만 보시고도 우리를 칭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랑을 하려고 마음만 가지셔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사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