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0.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25)
본문 : 벧후 3:14-15
제목 :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며칠 전 신문을 보면서 참 아이러니한 두 가지 사건을 보았습니다.
아침 방송을 잘 보시는 분들은 “행복전도사”로 잘 알려진 작가 겸 방송인 최윤희씨를 잘 아실 것입니다. 
‘행복 그거 얼마예요’(1999), ‘행복이 뭐 별건가요?’(2006), ‘행복의 홈런을 날려라’(2007) 등의 책을 쓰기도 했고 스타강사로 대접을 받으면서 여러 방송에 나와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에 지난 7일에 한 모텔에서 남편과 함께 자살한 시체로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유서에는 “2년 전부터 몸에 이상을 느꼈다. 폐·심장 질환으로 힘들다. 주위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별게 아니다 누구나 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외치던 그녀가 다가오는 병마와 싸우기 두려워서 인생을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그녀가 주장한 행복이란 좋은 환경 속에서 잘 살 때나 해당이 되는 행복일 뿐이고 언어로 우리를 속인 거짓 행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사건입니다.

또 하나는 국민일보에서였습니다.
미션라이프 전면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회개 금식 대성회”에 대한 뉴스가 실려 있었습니다.
기사 제목은 “회개합니다.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한 것을” 이라는 제목이 큰 활자로 인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 강사인 여의도 모 교회의 원로목사가 사진과 함께 성령 충만으로 회개운동을 전개해야 된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문에 그 원로목사의 아들과 아내가 합세하여 국민일보 경영권을 빼앗으려고 한다고 그들을 법에 고발한다는 내용과 함께 그들이 펼친 비리를 폭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회개를 외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자고 하면서 뒤에서는 재산과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세상에는 행복한 척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착한 척 거룩한 척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거짓에 속아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세상의 부귀영화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심지에 교회 내에도 이런 거짓선생들이 많이 들어와서 천국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흐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가 무엇인지 정말로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구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불에 타서 녹아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 날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들이 더욱 어떤 자세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입니다.
그리고 점도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것입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그런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노니
본문 14절 상반 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것은 바로 앞 13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시작될 신천신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바라본다는 말은 단순히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대하면서 기다리면서 지켜본다는 뜻입니다.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늘 주시하면서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했는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야곱의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이 삼촌 집에서 20여 년간 일을 했는데 삼촌은 야곱 때문에 큰 부자가 되었지만 야곱에게는 그의 딸만 주고 재산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삼촌에게 제안을 합니다.
모든 양과 염소는 삼촌이 다 가지시고 나에게는 아롱진 것이나 점이 있는 것이나 검은 색을 가진 양이나 염소만 자기의 몫으로 달라고 했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의 양이나 염소가 하얀 양이나 염소이고 검은 색이나 점이 있거나 아롱진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삼촌이 흔쾌하게 허락을 했습니다.

그 허락을 받고나서 꾀가 많은 다윗은 얼룩진 새끼들을 많이 낳게 하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 푸른 가지에다 듬성듬성 껍질을 벗겨 양떼들이 물을 마시는 개천가에 두고 그것을 보며 물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나뭇가지들을 보며 새끼를 배기만하면 얼룩하고 점이 있고 아롱진 새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야곱은, 충실한 양떼들이 새끼를 밸 때쯤 이를 보게 하여 충실한 새끼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심히 풍부하게 되었고 마침내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양떼들이 얼룩진 것을 바라볼 때 얼룩진 새끼를 낳은 것처럼 우리 인생들도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도 그냥 기도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막연하게 무슨 차하지 말고 차종 크기 색깔을 정하고 바라보면서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바로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인본주의의 생각이요 믿음이 아닌 신념을 말하는 것이지 바른 기도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라보기는 바라보되 바라보는 것 보다 무엇을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들이 됩니다.
특별히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만난 사건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그래서 흔히 애굽 생활을 죄인으로서 세상을 살던 생활로 비교를 하고, 광야 생활을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 그리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해서 많은 교훈들을 받습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무리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들이고 또 한 무리들은 과거에 살았던 애굽을 다시 생각하면서 후회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애굽에는 고기도 채소도 많아서 마음껏 먹고 살았는데 왜 이런 삭막한 곳으로 끌어내서 고생을 시키느냐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원망부터 먼저 합니다.
물이 없다, 만나만 먹고 못살겠다, 왜 이런 험한 길로 돌아서 가느냐? 별별 불평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오직 그 나라만 바라보고 전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원망하고 뒤를 돌아보던 사람들은 다 광야에서 죽었고 가나안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던 사람은 자유의 나라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살아났고 그 약속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그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세상의 것들이 다 불타서 없어질 때 함께 멸망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날이 오면 세상의 모든 가짓된 것들이 헛된 것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가 바라보고 살던 신천신지가 얼마나 좋은 곳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4절 하반절 말씀에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우리가 다 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우리 성도들은 그 앞에서 죄에 대한 심판은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그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삶이 너무나 추하다면 별로 주님을 위한 사랑의 흔적이 없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점도 없이 흠도 없이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나타나기를 힘써야 되고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점이 없다는 말은 더러움이나 얼룩이 없이 깨끗하고 순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비난을 받을 일이 없는 결백한 사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이 죄로 오염된 세상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고 잘못된 곳이 하나도 없는 완전무결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은 다 점이 있고 흠이 있어도 나는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모습을 볼 수 없고 또 자기가 가진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재니까 자기가 비교적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실 우리 가운데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이미 박혀 있는 이 나쁜 점들을 흠들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들을 없앨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결점과 흠들은 늘어가기만 하고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결혼을 하면 한 3년쯤은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합니다.
3년이 지나면 조금씩 마음이 바뀌기 시작하는데 그동안 사랑에 눈이 멀어서 보이지 않았던 결점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말 우리 신랑이 우리 아내가 이런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인줄 알았으면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라고 후회들을 합니다.

그럴 때 그 결점들 그 흠들을 없애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해하고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결점들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으면 참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흠과 점은 어떻게 할까요?
베드로 사도가 철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너희는 흠과 점이 없는 사람이 되라고 했을까요?
저는 이런 말씀을 이야기할 때가 정말로 신이 납니다.
기가 막히게 좋은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통 목사들은 이런 말씀을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잘 안 해줍니다.
여러분 이렇게 흠과 점이 없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흠과 점을 없애야 되고 흠과 점이 없는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우리에게 있는 나쁜 점과 흠을 깨끗하게 없애는 방법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시는 분들은 정신을 차리고 딴 생각하시는 분들도 집중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점과 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하필 베드로가 우리의 죄를 이야기하면서 점과 흠이라고 했을까요?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라. 하지 않고 점과 흠을 이야기 했을까요?
앞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에 이런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우리가 우리 조상 때부터 지어 오던 헛된 행실에서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흠과 점을 없애기 위해서 흠과 점이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피로 씻음을 받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평강 가운데 주님 앞에 설수가 있게 될까요?

우리 주님께서 화를 내시지 않으시고 웃으시면서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시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점과 흠의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지금부터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청소 깨끗하게 잘 해 놨는데 어디 가서 지저분한 걸레 하나 가지고 와서 청소한다고 하지 말고 깨끗한 데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을 찬송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찬송하는 삶을 살면 평강가운데서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만 하다가 주님 앞에 서려고 하면 두렵고 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주님을 찬송하고 산다면 날마다 주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찬양하면서 산다면 두려움 없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한 만큼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좋은 칭찬을 해 주실 것입니다. 

3.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15절 상반절 말씀에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너무 지쳐서 포기하려는 성도들에게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된다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9)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당장 오시지 않으시는 것이 우리에게 천만다행일지 모릅니다.
아직 구원받아야 할 우리 형제자매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나 자신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나 같은 것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쓰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없는지 잘 살펴보고 잘 단장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아주심 같이 오래 참으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오래 기다리면서 살다가 보면 별 별 생각이 다 드실 것입니다.
믿음이 식어지기도 할 것이고 사탄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 때마다 다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바르게 알아 할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을 기다리는 이 신앙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이 살아 있는 신앙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지켜보고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점과 흠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점과 흠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 점과 흠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사람이 평강 가운데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기다리기가 지치고 어려워도 그날을 기다리면서 참고 견디며 잘 분비하고 사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