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도행전 9장 1~9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성도 여러분! “주인(主人)”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뜻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집안이나 어떤 단체를 이끄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합니다. 또는 어떤 물건이나 사람을 소유하는 임자를 주인이라고 합니다. 또한 고용관계에서는 고용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자신의 주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사람이 진정한 주인을 찾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생은 늘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방향을 올바로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과 같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이 옳은 삶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한 면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주인을 몰랐기 때문에 헛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참 주인을 만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참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는 아름다운 열매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광성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인을 바로 찾으셨습니까? 나의 주인이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또한 그 주인을 바로 찾았다면, 그 주인의 뜻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주인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인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자신을 주인으로 알고 사는 무지한 인생
본문 1~2절에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울은 우리가 잘 아는 바울입니다. “사울(שָׁאוּל, Σαῦλος)”은 히브리 이름이고, “바울(Παῦλος)”은 헬라 이름입니다. 당시는 로마가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언어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이 두 가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즉 유대인 사회에서는 히브리 이름을 사용하고, 공적인 일이나 이방인들을 상대할 때는 헬라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 사울은 엘리트 그룹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는 혈통적으로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정통 유대인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이방인과 혼혈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유대인의 혈통은 어머니를 따랐습니다. 즉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인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부모가 유대인인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신뢰를 받는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랍비에게서 교육을 받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에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위상이 높았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을 돌로 쳐서 죽이는 유대인들이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를 유력한 증인으로 확보함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의 영향력은 당시의 사회에서 상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는 당당하게 산헤드린 공회의 공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가 그의 요청에 응하는 것을 봅니다. 따라서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도 인정을 받을 정도의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러한 자신의 위상과 권력을 예수의 제자들을 진멸하는 일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힘과 자신의 권위면 이러한 일을 행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9절에서 바울은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즉 사울은 자신의 길은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를 다시 말한다면, 사울은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은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습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진멸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울에게 그러한 생각과 삶은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농부가 부리는 짐승이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 같은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행26:14). 이후,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이 철저하게 잘못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는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나사렛 예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이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서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내 삶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술은 그렇게 고백하는데,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는 내 인생에서 주인의 자리에 나 자신을 앉혀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을 잘못 알고 있으면, 우리의 삶은 헛된 길로 가게 됩니다. 주인을 잘못 알고 있으니, 주인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하니, 주인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의 인생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고, 엉뚱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Ⅱ.참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시는 예수님
인생의 참 주인을 알지 못함으로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사울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큰 두 가지를 알려주십니다.
1. 주인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본문 3~5절에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약 220㎞ 거리입니다. 따라서 도보로 간다면 6일 정도가 걸립니다. 그런데 그 거리를 가는 동안 사울의 살기는 여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행들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울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때가 낮 12시 정도 되었기 때문에 태양의 빛이 가장 강렬하게 비칠 때입니다(행22:6). 그런데 그 태양의 빛보다 더 강력한 빛이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 이때 사울은 그 빛으로 인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땅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은 그 음성을 듣고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응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주여(κύριος)”라고 했다고 해서 그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이 현상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은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존재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구약성경에 능통한 자였기 때문에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떨고 있는 사울에게 주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표현 가운데 “Ἐγώ εἰμι”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하시는 표현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אֶהְיֶה אֲשֶׁר אֶהְיֶה)”라고 하셨던 표현을 헬라어로 번역하면 이 표현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나는 네가 믿는다고 말하는, 너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너의 주인인 하나님이야. 그런데 너는 그 주인이 나를 모르고 살고 있단다. 그래서 너는 나를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나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야. 너는 나를 따르는 자들을 진멸하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를 박해하는 일이야.”
아마도 바울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길이 완전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충성이 완전히 부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주인도 몰라보고, 오히려 그 주인을 물어버린 개와 같은 처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모르는 인생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2. 주인이신 예수님은 사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훗날 그가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증언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예수님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행22:10).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주인을 인식한 후에 처음 던진 질문입니다. 이제야 내가 누구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하고,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본문 6절에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16~18절에서는“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사울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왜 사울을 찾아오셨고, 만나시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인 사울에게 맡기실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나의 주인을 알고 있습니까? 나 생각과 내 계획, 내 삶의 전부를 주관하시는 주인을 바로 알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내가 너를 죄악에서 구원하였고, 내가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고, 너를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주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모든 것을 오직 주인이신 주님께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주님이 내게 맡기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목적을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인을 바로 알고 있는 자의 삶입니다.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입니다.
Ⅲ.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
본문 15~16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 빛으로 인해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함께 가던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다메섹으로 들어갔습니다. 살기가 등등하고 권위자의 모습으로 다메섹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볼 수도,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라고 하는 사람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사울이 장차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로 인해 그가 많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예수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하고, 예수 때문에 고난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에 대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이후의 19~20절에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3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11절).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아나니아가 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되는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다(12절). 그리고 사울이 기도하는 동안 예수님은 그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야 그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답게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인을 아는 사람은 주인을 아는 사람답게 삽니다. 그런데 주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하게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주인을 알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나는 내 주인을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인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장차 그 주인 앞에 섰을 때 칭찬과 상급이 아닌 책망과 쫓겨남을 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나의 증인이 되라. 나의 빛을 비추는 빛의 삶을 살고, 나를 위해 녹아지는 소금이 되고, 나를 드러내는 향기가 되고, 나를 나타내는 편지가 되라.”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먼저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하신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다른 그 무엇도, 심지어 나 자신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만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분의 목적에 우리의 삶의 방향을 맞춰야 합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본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아가고, 바르게 알아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