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3.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12)
본문 : 벧후 2:2-3
제목 : 거짓선생의 특징-호색과 탐심.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첫 설교에서 이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로 시작이 되는 여덟가지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주신 성경말씀이 오히려 우리가 불행해질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될까요?
우리가 성경말씀을 잘 모르고 오해한 부분도 많이 있겠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복과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은 일시적인 복이고 육신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언제나 지속이 되는 지복을 말하는 것이고 일시적인 육신을 자극하는 복이 아니라 참된 마음의 행복 영적인 행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탄과 사탄을 추종하는 거짓선생들이 거짓된 행복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행복이 아닌 것을 행복인양 따라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거짓성생들이 말하는 거짓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고리타분하게 성경말씀대로 살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사탄이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거짓이 진짜처럼 만든 시대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거짓된 이 세상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행복으로 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거짓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거짓 선생들은 호색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거짓 선생들은 탐심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했습니다.
호색과 탐심이 얼마나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1.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본문 2절 말씀에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호색하는 것” 이란 잘못된 문란한 성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것입니다.
성을 통하여 부부간에 사랑을 유지하게 하고 가족을 이루게 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아주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이 그 성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문란하게 하여서 추악한 성이 되게 하고 사람을 타락시키는데 사용을 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50여년의 세월동안 세상의 모든 것이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그 중에서도 참 많이 바뀐 것이 성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성춘향 이야기를 많이 듣고 살았습니다.
이몽룡 도령이 돌아올 때까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정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을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녀 간에는 서로 정조를 지키고 사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에 “자유부인”이라는 영화가 나와서 춘향이와 같은 사랑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아주 자유로운 성문화가 세상에 퍼지기 시작을 합니다.

우리가 잘 보는 텔레비전의 연속극을 보면 성에 대한 개념들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음을 봅니다.
옛날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지극히 사랑하는 그런 이야기가 연속극의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남의 남자 남의 여자 빼앗아 오기가 연속극의 주제이고
내 남편 내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불륜에 빠지는 것이 연속극의 주제입니다.

요즘 막장드라마가 매우 인기라고 합니다.
막장 드라마란 복잡하게 꼬여있는 인물관계나 현실상으로는 말이 될 수 없는 상황을 설정하여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드라마를 막장드라마라고 합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남의 집 아내나 친구 애인이나 심지어 집안의 친척들을 사랑하게 하고 아주 막장까지 가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드라마로 만들어서 방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예 남자가 남자끼리 사랑을 하는 것도 연속극에 넣어서 내어보내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몇 년 동안 여자인줄 알고 사랑한 애인이 글쎄 남자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속은 게 분해서 살인을 하고 말았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어디까지 더 문란해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예 짐승과 같아져야 그만 두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잘못된 드라마 잘못된 사람들의 이야기 잘못된 사람들의 유혹 때문에 성스러워야 할 우리의 성이 더럽고 추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성의 문화를 따라감으로 인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참으로 부끄러운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까지 이런 사탄의 성문화가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름으로 타락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배로운 믿음이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가 비방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교회의 성직자가 이런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의 말씀이 훼방을 받게 되고 비웃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 못지않게 육신의 정절도 중요하게 지켜야 합니다.
잘못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말로 조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성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 속에는 성적인 욕구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욕구가 바르게 사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사도도 음행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전7:2-3) 라고 했습니다.

성적인 타락을 막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남편은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는 아내의 의무를 다하라고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부부간에 서로 사랑을 나눌 때 성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부간에는 서로 분방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7:5) 라고 했습니다.

특별 기도를 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에 며칠정도는 분방을 할 수 있지만 기도가 끝나면 바로 다시 합방을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탄의 유혹을 받지 않게 되고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적으로 타락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세상이 변하니까 세상이 타락하니까 세상에 거짓선생들이 득세를 하니까 우리들도 그게 벨게 아니구나.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로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잘 살펴보시면 하나님께서 이 성적인 타락을 얼마나 악하게 생각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의 홍수 사건도 사실 이 성적인 타락으로 인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경건한 사람들이 경건하지 못한 세상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 잘못된 결혼을 하는 것을 보고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노아홍수 이후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심판하신 것도 사람들의 성적인 타락으로 인한 것입니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남자들이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려고 롯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내어 놓으라고 협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성적으로 타락을 해서 별의별 짓을 다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성적으로 타락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성경은 잘못된 성적 유혹을 경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음녀의 유혹을 받는 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저 음녀는 깊은 구덩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참으로 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며 사람들 중에 사악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잠23:27-28)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좋아 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거짓선생들이 하도 그것이 좋은 것처럼 이야기들을 하니까 때로는 우리도 세뇌가 되어서 그렇게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고 계시는 분야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정절 못지않게 육체적인 정절도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본문 3절 말씀에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거짓 선생들의 특징은 탐심으로 지어낸 말을 가지고 성도들을 이익의 도구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종인가 가짜 하나님의 종인가를 구별하려면 돈의 욕심이나 명예의 욕심이 얼마나 많은가를 잘 살펴보면 됩니다.

고신대학 역사신학교수인 이상규 교수는 중세교회의 부패를 3가지로 파악하였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교리와 신학적인 변질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교회가 세속 권력을 탐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학적 변질이란 십자가의 복음 이신칭의의 진리를 외면하고 인간중심의 도덕적인 것을 강조하는 변질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에서 떠나 인간중심 인간의 경험중심으로 타락한 것이 제일 큰 부패의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와 못지않게 교회를 타락하게 한 원인은 부에 대한 지나친 탐욕과 세상의 명예와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교회의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종교 개혁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교황 레오 10세(1513-1523)때 시행한 속죄권 발매 제도였습니다.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막대한 자금을 필요로 하게 되자 그것을 조달하는 목적으로 속죄권을 판매하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맬 수 있고 풀 수 있는 권세를 받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천국과 지옥문을 열어 놓았다. 이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사함을 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해 표를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궤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곧 천국으로 옮김을 받을 것이다"라고 명시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이 타락한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다시 닮아가고 있다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인데 크고 화려하면 더 좋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를 크게 짓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담임목사의 영광을 위해서 주변에 많은 교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회만 크게 지으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성도들이 너무나 불쌍합니다.
평생 교회 짓는다고 헌금하다가 세월 다 보낸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금방 지었다가 또 다시 크게 짓고 빚내서 또 그 빚 갚고 그렇게 세월 다 보냅니다.
목사 개인의 욕심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에서 그렇게 했다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불행도 사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이 우리의 욕심을 채워줄 것으로 알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사실 그 욕심을 채울 재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해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많은 돈이라는 것은 상한선이 없습니다.
항상 자신이 가진 돈이 부족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수십억 수백억을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이 세상의 거짓선생들이 만든 법칙을 따라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어리석은 부모님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성적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이 이기심만 조장하고 키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성적 올려서 어떻게 하든지 출세를 해서 잘 먹고 잘 살라고 말합니다.

물론 돈은 어느 정도 우리에게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에 공부 잘해서 출세도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살기가 더 어렵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다만 지나치게 돈에 욕심을 내거나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믿는다거나 돈이 많으면 무조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거짓말일 뿐입니다.

참된 행복이란 그런 돈으로 세상적인 복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행복과 반대되는 곳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나친 탐심을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를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 달란트만 주셨는데 다섯 달란트 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탐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고 항상 큰 것만 바라보고 다니는 사람도 탐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현실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탐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자꾸 더 큰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탐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죽을 때가지 써도 다 못쓸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모으겠다고 애를 쓰는 사람은 탐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이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모르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쓸 줄 모르는 사람도 탐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목사가 세상 물정도 모르는 철없는 목사라서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저처럼 돈에 대해서 평생을 목말라 하면서 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 없이 빈손으로 태어나서 혼자 벌어서 공부하고 혼자 벌어서 결혼하고 밥도 수없이 굶어 보고 돈 이 없어서 받는 고통 서러움도 저처럼 많이 당한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돈 좋아합니다.
교회나 제 자신이나 지금보다 돈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돈이 곧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때로는 가난한 것이 더 행복해지는 것임을 압니다.
주님을 위해서 가난해 진다면 그것은 엄청난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주님께 충성하다가 거지로 생을 마친다고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최고의 성공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돈에 욕심을 낸 사람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화려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악을 행하든지 사기를 치든지 남의 것을 빼앗아 오든지 어떻게 하든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 박수를 받고 존경을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씀을 합니다.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탐심을 가지고 이 세상의 재물과 명예와 영광을 차지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옛날에도 심판을 하셨고 또 그 심판은 그치지 않고 계속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첫 설교에서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가난한 자란 보통 살기가 좀 어려운 정도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구걸이나 해야 겨우 먹고사는 비참한 가난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비참한 사람이 행복한데 그 이유는 천국이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데 그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욕심을 버리고 가난하게 사는 우리들에게 늘 어려워서 울던 우리들에게 화려한 그 영원한 나라를 주시고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살집, 너무나 화려하고 견고해서 황금보석으로 꾸민 집이라고 하는 멋진 집, 멋진 나라를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것에 너무 마음 빼앗기지 말고 너무 욕심내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에도 이미 거짓 선생들이 퍼트린 잘못된 가르침들이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거짓선생의 특징은 호색과 탐심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바른 성생활 바른 물질관을 가지고 살 때 참된 행복을 누리면서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