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대제사장으로 존재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심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는 은총과 특권이 무엇인지를 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심을 믿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 대제사장이십니다.

 

본문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앞의 14절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면 본문 15절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받으신 시험을 통해서 그분이 완전한 인간이셨음을 설명합니다. 다만 그분의 인성은 우리와는 달리 죄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서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본문에서 참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크게 두 가지의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연약하다(σθενείαις)”라는 것은 신체뿐만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연약함까지를 아우르는 의학적, 종교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약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느끼는 피곤함, 배고픔, 목마름, 아픔과 같은 신체적인 연약함과 정신적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연약함을 경험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 다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고 고통을 당하는지를 다 아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지상에서의 생애는 모든 인간이 지니는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동정하다(συμπαθσαι)”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동일한 느낌을 받다, 공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쉽게 이해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 특히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아주 특별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완전히 구별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헬라의 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서 무감각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인간 세계와 연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우리의 연약함까지 완전하게 동정하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잘 아시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경험하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서 동정의 마음을 가지실 수가 있습니다. 비록 그분이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이 되시고 사람의 삶을 사심으로 인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실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의 어려움과 연약함을 가장 잘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음을 강조하는 두 번째 모습은 그분이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을 똑같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분은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을 다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으로 하여금 구속주로서의 사역을 완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격하고 유혹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 비해 비록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당하신 시험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고 더 강한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태초의 사람 아담은 사탕의 공격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도 다양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그 모든 공경 앞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셨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의 소리,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시험을 당하셨기에 시험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연약함을 지녔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시험에 빠지게 되는지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를 가장 잘 도우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시험의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간다면 능히 이기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많은 짐승이 죽어도, 아무리 귀한 짐승이 죽어도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하나님 앞에 제물로 죽은 그 많은 짐승은 사람의 죄를 완전히 대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범했을 때마다, 또한 그 죄가 생각날 때마다 반복해서 짐승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완전한 메시야이신 것입니다. 그분은 참 사람이시기에 사람들의 죄를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당할 정죄와 형벌이 없어진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으로 우리의 죄와 그 결과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무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5절에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고,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에 대해서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그 세례의 특징은 회개의 세례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죄를 범하셨고, 회개하셨기에 그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다른 사람들의 세례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과 같이 되기 위한 세례였습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한 세례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자 하실 때,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었기에 거부하고 말렸던 것입니다(3:13~14).

 

또한 예수님은 받은 많은 시험은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즉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지만, 우리의 시험은 우리의 욕심에 끌려 당하는 시험이고, 예수님의 시험은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시험입니다. 따라서 사탄은 예수님의 본질적인 내적 세계까지는 공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의 계속되는 유혹 앞에서도 조금의 양보나 타협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본성을 가지지 않으셨기에, 또한 죄를 반드시 극복하셔야만 하는 죄의 습성도 없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탄을 이기심으로 그의 시험에 빠지거나 넘어지거나 죄악의 자리까지 가지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셨기에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 무죄하심으로 인해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만약 그분에게 죄가 있다면 그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지 결코 타인을 위한 죽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지으실 수 없고, 죄를 아시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그분은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십니다.

 

본문 1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은혜의 보좌(τθρόντς χάριτος)”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킵니다. 이를 은혜의 보좌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성막 또는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은 지성소입니다. 이는 성전의 가장 안쪽에 있는 곳으로, 휘장으로 막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명령하심으로 만든 법궤가 있습니다. 이 법궤는 가로가 두 규빗 반(114), 세로와 높이가 한 규빗 반(68.4) 되는 나무 상자에 금으로 입혀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십계명의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어있었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법궤에는 금으로 만든 덮는 뚜껑이 있었습니다. 다만 이 뚜껑에는 그룹 둘이 날개를 펴서 법궤를 덮고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뚜껑을 가리켜 출애굽기에서는 속죄소(כַּפֹּרֶת)”라고 불렀습니다(25:17). 이 속죄소는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속하시는 장소, 곧 용서의 장소입니다. 또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은혜를 받는 자리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들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일 년에 단 한번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말씀하신 절기 가운데 속죄일(יֹום הַכִּפֻּרִים)”이라고 하는 절기가 있습니다. 이는 저들의 달력으로 710일입니다. 바로 이 날에 대제사장이 자신을 위한 제물(수송아지)의 피와 백성을 위한 제물(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피를 속죄소 위에 뿌림으로 자기와 자기의 가족,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실 구약시대에 이 속죄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아무 때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27:51). 이로 인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과거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짐승의 피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들은 그 피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곳이 은혜의 자이기에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용서받은 자로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를 마음껏 받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다음의 두 가지를 받아 누려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의 긍휼하심(λεος)”불쌍히 여김, 자비(慈悲)’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헤쎄드(הסד)”로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를 가리킵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지 못한 자는 죄를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도 없고, 궁극적인 안식에 동참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꼭 필요한 때에, 자장 적절한 시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시간이나 형편에 따르지 않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때, 온 세상의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때에 나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시기를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너무 일찍 움직이시지도 않습니다. 가장 정확하고, 가장 적당한 때에 도우십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조급해서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할 그것은 하나님의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열어놓으신 그 길을 통해서, 나를 위해 대신 속죄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는 그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십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사역을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를 따라 도와주십니다.

 

 

사랑하는 광선의 성도들이여!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실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아무런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원하기를 우리 모든 광선의 성도들이 날마다 하나님의 이 은혜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성도들에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