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숙을 이루라

 

 

 

히브리서 61~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에 나의 영적인 성숙도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과연 어린아이의 성숙함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장성한 자의 성숙함을 지니고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지금 사도는 구약의 모든 제사장보다 뛰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들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서신을 읽는 성도들의 영적 수준이 너무나도 낮아서 사도가 전하는 이 심오한 영적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사도는 저 성도들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한 자들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 수준에 머물지 말고 장성한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담긴 그 풍성한 뜻을 바로 깨달아 알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장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성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륜에 맞게, 또한 우리의 믿음의 수준에 맞게 성숙해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조숙증에 걸려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미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보다 더 성숙한 내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정도에 맞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영적인 성숙함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필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숙함을 이루는 일은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성숙해져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 사도는 영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자들, 아니 분명 연륜을 따라서 이제는 능히 가르치는 자의 수준에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퇴보해서 진리의 지초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지경에 있는 자들에게 영적인 성숙함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장성한 자가 되어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도전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믿음이 연약해서 흔들리는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붙들어 주고, 인도해 주는 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 장성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다운 자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영적 성숙을 이루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초보의 도를 버려야 합니다.

 

 

본문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버린다(φίημι)”라는 표현은 떠나보내다, 쫓아내다, 포기하다, 무시하다, 이혼하다등처럼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있는 것들 가운데서 떠나보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쫓아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포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귀중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그것을 무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혹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영적 성숙의 과정에서 유익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퇴보하게 하고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살피고 내 영적인 수준을 가늠해서 내 안에서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영적 성숙에 유익하지 않은 것이라면 과감하게 정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지금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버리라고 권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 표현을 거꾸로 번역했습니다, 원문대로 한다면그리스도의 초보의 도입니다. 즉 이는 기초적인 교리, 기본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진리와 교훈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초보의 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 가운데서 지극히 초보적인 진리, 기본적인 원리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러한 초보의 도를 배우는 자들은 영적 어린아이들입니다. 어린아이는 초보적인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에게 갑자기 어른들의 세계, 어른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진리와 교훈을 가르친다고 해도 저들이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젖을 먹는 어린아이에게 단단한 음식을 주어도 먹지 못하고 소화도 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서신을 읽고 있는 성도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초보의 도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원리에 매달려 발전이나 성장을 향해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심지어 퇴보하는 단계로 더 떨어져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아직도 복음의 진리에서 기초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마치 젖과 같은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고 좀 더 깊은 영적 진리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빨리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내 안에 나의 영적인 성숙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빨리 내보내야 합니다. 아무리 그것이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을 지체하게 만드는 것들을 과감히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영적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절에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터를 닦는다라는 것은 건물을 세울 때, 그 기초를 놓는 행위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즉 건물을 세우기 전에 땅을 다지고 그 위에 든든한 기초석을 놓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이 견고해집니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인 왕궁을 보면 큰 기둥을 받치는 돌이 있습니다. 그 돌은 맨땅에 올려놓은 것 같지만 그 땅은 다지고 또 다져서 그 돌과 기둥을 능히 견딜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 기둥 하나가 받는 하중이 5톤을 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건물이 몇백 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서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기초가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그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기초는 든든하게 닦아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견고하게 닦아있는 기초를 다시 닦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해야 할 일을 그 기초 위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견고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초만 닦고 있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도가 다시 닦지 않아도 되는 교훈의 터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는 여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가 이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당시의 성도들이 이와 관련된 교훈들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교훈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매여 있음으로 인해 우리의 영적 성숙을 방해는 요소들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회개와 신앙입니다.

사실 회개와 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죄를 회개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교리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성령론에서 배우는 구원의 서정 9단계(소명, 중생, 회개, 신앙,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에서 이 회개와 신앙을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먼저 회개(悔改, μετάνοια)”는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입니다. 그리고 죽은 행실은 죄악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회개(μετάνοια)”는 문자적으로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죄인이 죄악과 사망을 향하여 걸어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단지 죄를 고백하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 (), ()라고 하는 전인(全人)의 완전한 변화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첫 메시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셨고(1:15), 훗날 베드로도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자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2:37~38).

 

 

다음으로 신앙(信仰, πίστις)”은 죄악을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존재도 우리가 신앙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신앙은 말로만 표현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백과 함께 그 고백에 맞는 삶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죄악된 행실로부터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계입니다. 이것들이 선행되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성숙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한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더 성숙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신을 받은 저 성도들은 이 기초를 되풀이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정도로 어린아이의 성숙도에서 정체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세례와 안수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시행하는 예식이나 관습과 관련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아주 중요한 일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그 의미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미성숙한 지식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먼저 세례(洗禮, βαπτισμός)”는 죄를 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이 세례에는 먼저 신앙고백이 필요하고, 그 후에 공식적인 절차로 세례의 예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이 예식이 죄 사함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례를 유대인의 전통적인 결례와 혼동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음에도, 유대의 전통 결례 의식으로 되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흔들리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초보적인 단계에서 속히 벗어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안수(按手, πιθέσεώς τε χειρν)”는 본래 손을 얹는 것인데, 이는 구약시대부터 행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경우에 시행되었습니다. 죄악을 전가하는 의미로 희생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3:13). 아버지가 그 자식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습니다(48:14~15). 특정한 직분을 수여하기 위해서 그 직분을 받는 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8:10).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병자에게(6:54), 축복할 때(10:13), 교회의 직분자나 선교사에게(6:6, 13:3), 성령의 임재를 원할 때(8:17, 19:6) 등 다양한 경우에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안수는 아마도 성령의 임재와 관계된 것이었을 것입니다. 즉 안수를 통해서 성령의 임재가 이루어진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안수가 성령의 임재나 성령 충만을 위한 통로는 아닙니다.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은혜로 단번의 역사이며, 성령의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며 명령입니다(2:28~29, 5:18). 따라서 이는 성도들이 구하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11:13)

 

 

셋째는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입니다.

이는 성도의 영원한 소망에 관련된 것입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는 부활과 심판에 관한 관심이 높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영혼의 불멸을 믿는 종교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헬라의 사상과는 대립이 되는 개념입니다. 헬라의 철학은 부활의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저들은 윤회(輪迴)사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은 자의 부활은 불가능한 일로 여겼습니다. 사두개인들조차도 부활을 부인했습니다.

 

 

신약에서도 부활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고전15:20). 또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생명의 부활에 이릅니다(8:11). 그래서 초대교회가 전한 복음의 핵심에는 언제나 부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대하는 성도들도 처음에는 부활을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부활에 대한 믿음이 흐려졌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그 부활의 진리를 다시 배워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심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심판은 유대교의 신앙적 유산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즉 이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율법은 이 심판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마지막 심판에서 숨을 수 있는 영원한 피난처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급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그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신들의 믿음으로 충분히 심판을 면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믿지 못함으로 그 초보적인 교리를 다시 닦아야 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믿는 믿음, 내가 고백하는 믿음, 내가 살아내는 믿음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으로 나의 전부를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2절에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을 원문의 뜻을 따라 자세하게 번역한다면 우리가 완성 혹은 성숙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의 완전한 데(τελειότης)”는 단순히 완전한 지식이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1절에 등장하는 초보(ρχή)”가 영적 어린아이를 위한 교리의 한 부분이라면 본문의 완전한 데(τελειότης)”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교리의 한 부분입니다.

 

 

사실 우리에게서 기본적인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매달려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영적 어린아이로 남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기초만 튼튼하게 닦아놓고 그 위에는 아무것도 세우지 않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공을 들여서 기초 공사를 잘 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머물러 있다면, 결코 아름다운 건축물은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그 완전함을 향해서 전진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숙을 향해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오늘에 만족하고 오늘에 정체된다면, 우리는 영적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영적인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면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 3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라고 한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성숙은 근본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허락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비록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다면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은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숙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울의 영원한 푯대가 되시고, 우리의 종착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