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으로 증명되는 믿음

 

 

 

히브리서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 장로교에서 고백하는 신조(信條)가 있습니다. 이는 12개 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구약과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信仰)과 행위(行爲, 本分)에 대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심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시며,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과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삶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삶으로 증명이 되고, 삶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26).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이 둘을 균형 있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Church christian, 또는 Sunday christian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삶은 엉망인데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믿음보다 삶을 강조하다 보니 율법주의자들이 많이 양성되기도 합니다. 마치 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믿음과 삶을 일치(一致)시켜야 합니다. 믿음과 삶이 별개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진정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믿음에 근거하고, 믿음을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이 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은 위선(僞善)이 됩니다. 그리고 이 거짓된 믿음과 거짓된 삶(僞善)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7:21, 25:41f).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이미 가진 신앙고백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좋은 언약이 있고, 더 좋은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해야 하며, 인내함으로 그 약속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도전 앞에서 끝까지 견디어 승리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순종으로 증명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안식(安息)”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결론적인 권면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인 안식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가 안식이 들어갈 때까지 힘써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힘쓸지니(σπουδάσωμεν)”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에 매우 몰두하거나 사람과 사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성심과 성의를 다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가 본문에서 나타내고 있는 의미는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서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땀과 노력, 정성과 수고가 투자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 안식에 들어간다면 그 안식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런 희생도 없고, 아무런 충성도 하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기까지는 우리는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안식에 참여하기까지의 길은 좁은 문입니다. 협착한 길입니다. 따라서 이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몸부림쳐야 합니다. 많은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심을 얻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 의를 얻은 자로서 안식을 누리가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힘씀이 없다면 우리는 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 곧 안식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서 힘쓰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한편, 사도는 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배교(背敎)”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 그리고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배교하는 말입니다. 이는 당시 교회 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서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진리에서 떠나 율법주의로 돌아가라고 하는 압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는 이러한 행위를 배교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교자는 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모습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은 합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나는 그 안식이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습니까? 나는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이 된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 삶의 중심에 하나님과 말씀과 교회를 두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냥 적당하게 살아가면서 내가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저 사도가 피끓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순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안식하게 될 그 날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을 순종의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λόγος)은 살아 있습니다.

 

 

본문 12절과 13절의 말씀은 문맥의 흐름과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 본문만을 따로 떼어서 하나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은 하나님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설명하는 구절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한 목적을 향해 아주 정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도 앞의 내용과 분명한 연결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또한 우리가 살펴보면 앞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 본문은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믿음과 순종 그리고 영원한 안식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왜 순종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12절에서는 그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 있고(Ζν)”라는 말은 성경에서 생수(4:10, 또는 생명의 말씀(7:38), 산 길(10:20), 산 소망(벧전 1:3)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졌거나, 또는 그 생명을 가져오는 통로나 수단과 관련해서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그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상 우리는 그 말씀에 대해서 그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음성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반드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5511절에서 하나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3절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공간에 빛이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가복음 714절에서 예수님은 죽어 관에 누워 있는 청년을 향해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살아 있는 말씀은 청년에게 생명을 주어 일어나게 했습니다. 요한복음 1143절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생명의 말씀은 죽고 썩어 냄새가 나는 죽은 나사로가 걸어 나오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해서 그 말씀은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말씀이 가지는 구속력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에게는 최고의 복이 되지만, 또한 그 말씀을 부정하거나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결과를 낳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입니다. 이는 찌르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 고대와 중세의 저 서양의 군사들이 주로 사용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입니다. 이는 자르는 용도로 사용하며, 주방에서 사용하거나, 동양의 군사들이 주로 사용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μάχαιρα)”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위의 두 종류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검은 아주 예리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베지 못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의 물리적인 검은 물질적인 것만을 벨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를 벨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까지도 벨 수 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칼은 인간의 육적인 생명을 없앨 수는 있지만 영적인 생명까지는 없애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육적인 생명뿐만 아니라 영적인 생명까지도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지금 사도는 인간의 구조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위대한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까지고 살피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가장 은밀한 생각까지도 다 아시고 살피시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뜻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일에 대해서만 판단합니다.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뜻까지도 그 예리함으로 쪼개고 찔러서 분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과 합하는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앞에서 애매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합니다.

 

 

본문 13절에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느니라(τετραχηλισμένα)”라는 단어에 대해서 W.Barclay라고 하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레슬링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시합하는 자가 상대방의 목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레슬링 경기는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상태로 했습니다. 따라서 한 선수가 다른 선수의 목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그는 빠져나가지 못하고, 또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데 사용한 용어인데, 동물을 매달아 놓고 그 가죽을 벗기게 되면 그 동물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감출 수가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재판소나 형장으로 끌려가는 죄인이 머리를 숙이지 못하게 턱 밑에 날카로운 칼을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수는 자기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게 되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도망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의 내부까지도 완전히 드러나게 함으로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은 죄인이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인해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우리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고, 저 천국에서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하고 불순종한다면, 그러한 죄인에게는 영원한 멸망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 무엇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췸을 받는 순간 그 죄악상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안식에서 영원히 제외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얼마나 확고한 믿음이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열심히 순종한다고 하지만 진정 내 안에는 믿음은 없고 다만 인간적인 열심만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체면 때문에, 인간적인 정 때문에 교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우리의 교회 생활은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시는 성령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광성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을 받고 그 영원한 안식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