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7. 27. 광성교회 주일 낮 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80)
본문 : 막 14:66-72
제목 : 닭 울음소리를 듣고 사십니까?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친한 목사님 사모님이 글을 쓰시는 분이신데 좋은 책을 한 권 선물로 주셔서 읽었습니다.
“부사가 없는 삶은 없다”라는 책입니다. ‘대체로’, ‘너무’, ‘아무리’. ‘하필’. ‘자꾸’…….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꾸며주는 이런 부사를 사용해서 인생의 여러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 인생에 ‘매우’ 기쁜 일이나, ‘너무’ 좋은 일이나, ‘더욱’ 보람된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차마’ 있어서는 안 될 일이나,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나,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불행한 일들이 더 많습니다.
이런 부사를 중심으로 쓴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가슴을 아프게 하는 부사는 ‘제발’이라는 부사였습니다. 한 아이가 심장 부정맥으로 응급실에 실려 와서 전기 충격으로 치료를 하는데 잘 되지가 않습니다. 아이의 부모나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제발’을 외칩니다. 제발 이 아이의 심장이 회복되게 해주세요.
그리고 작가는 이렇게 글을 맺습니다. “제발 신이시여 제발 모든 이의 생을 지켜 주소서”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에게 제발이란 정말로 가슴 아픈 단어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바람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할 때 ‘제발’이라고 합니다. 또는 이런 비극적인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간구할 때 ‘제발’이라고 합니다.‘제발’ 꼭 이루어지도록 가슴 태우는 간절한 소망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불행한 일에 이런 ‘제발’이라는 호소가 우리의 삶에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 ‘제발’이라는 단어가 절로 나오는 불행한 일이 기록되었고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제발 해야 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발’이라는 부사를 가슴에 담고 이 말씀을 제발 잘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사십니까?
오늘 본문 72절에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닭의 울음은 그냥 우연히 자연적으로 나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하시는 사인이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제발 이런 경고의 닭울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경고를 받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제발 그 닭 울음소리를 알아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마가복음 강해 설교를 죽 듣고 계시니까 오늘 본문의 앞뒤를 대강 아실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파송한 무리에게 잡혀가셨고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서 재판을 받게 했고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가지 않고 멀리서나마 예수님을 따라와서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와서 하인들과 불을 쬐면서 동향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베드로에게 와서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뜰로 갔을 때 또 그 여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라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체포해서 벌을 주려고 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창피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자라고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다. 어쩔래 라고 하면 그만일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고백했던 그 고백들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감했던 베드로가 갑자기 딴 사람처럼 바뀝니다. 그 여종의 첫 번째 지적에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라고 했고 두 번째 지적에 “또 부인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다. 정도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적에는 아주 강하게 부인합니다.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저주를 하면서 맹세를 하면서까지 아주 단호하게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이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때 닭이 두 번째 울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그 두 번째로 닭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원문 번역 성경을 보면 첫 번째 부인했을 때 그때 바로 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닭울음 소리는 듣지 못하고 두 번째 울 때야 비로소 그 닭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만 하고 그 자리를 피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우리가 자주 들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다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 이런 엄청난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도 막상 작은 어려움이 당하자 저주하고 맹세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복음의 시작으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작은 어려움 때문에 쉽게 그 믿음을 부인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탄을 따라 멸망으로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를 비웃으며 조롱합니다. 이 좋은 세상에 아직도 교회에 다니냐? 그 귀한 돈과 시간을 바치면서 교회에 다니냐? 이렇게 좋은 술도 한잔 못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재미있게 놀지도 못하고 고리타분하게 교회나 다니냐?
이런 조롱이나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조롱이나 유혹에 넘어가서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아직 떠나지는 않았지만 기회만 되면 핑곗거리만 생기면 떠나리라고 마음먹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조금씩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죄를 짓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베드로에게 들려주었던 닭 울음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도 합니다.
몹쓸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실패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연히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닭 울음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원하기는 제발 이런 경고의 닭 울음소리를 들을만한 위태한 자리에 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려는 그런 자리에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쩔 수 없이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다면 제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경고의 닭 울음소리를 빨리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내가 잘못 사는지 그래서 경고의 닭 울음소리가 나지 않는지 살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십니까?
본문 72절에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전날 밤에 하신 그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때는 그 말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도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전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면 같이 잡혀갈 것이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면 나도 같이 따라 죽을 것입니다. 제가 치사하게 살기 위해서 거짓말이나 하는 그런 위인인 줄 아십니까? 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다고요? 그런 쓸데없는 염려는 붙들어 매십시오.
이렇게 큰소리를 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인데 그런 자신의 허풍쟁이 같은 말도 함께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뛰쳐나가서 이렇게 통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큰소리치면서 살지만 살다가 보면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고 세상은 너무나 험해서 잘못할 때가 많습니다.
잘못은 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잘못한 후에 우리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가 잘못을 알고 회개하는가가 문제입니다. 회개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붙잡고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평신도 때 잘 못 한 것 중에 하나는 설교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너무 교만해서 목사님 설교가 귀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거의 잘 안 듣고 살았습니다.
가끔 듣기는 들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저건 김 집사가 들으면 좋겠고 저건 장로님이 들어야 할 말씀이고 나는 잘나가니까 별로 들을 말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잘 안 들으니까 내가 늘 잘난 줄만 알았지 뭘 잘못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주일마다 교회로 부르시고 주일마다 나에게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그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니까 잘못을 깨달을 수도 없고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업 망하고 나서 마음이 가난해지니까 설교 말씀이 어찌 그리 은혜가 되는지 어찌 그리 내 사정을 다 알고 나에게 말씀을 하시는지요. 말씀을 들으면서 근 1년간을 울었습니다. 주일날도 울고 새벽마다 울고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돌아보니 얼마나 내가 흉악한 죄인이고 지질히도 못난 놈인지 부끄러워서 울고 죄송스러워서 울었습니다. 울다가 목사님한테 걸려서 이렇게 목사가 되었습니다.
제발 설교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나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기도 하고 앞으로 내가 살아갈 때 꼭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그 동정의 눈빛을 보고 사십니까?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셨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라고 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드릴 질문은 61절에 있는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는 대목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얼굴을 돌이켜 베드로에게 향하고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실패의 현장을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 눈빛이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제가 예수님이라면 제가 예수님이 되어서 그런 베드로를 보았다면 비웃는 눈으로 보았을 것이고 증오의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자식이 뭐 절대로 배반 안 해, 죽는 데까지 같이 가, 그렇게 큰소리친 놈이 그렇게 나를 배반해 라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너 조금 있다가 보자 내가 사흘 후에 부활할 것인데 그때 너는 죽었다. 이런 증오의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분이 아니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도 다 아시고 우리가 때로는 실수도 하고 배반도 할 것을 미리 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1) 그 눈빛은 동정의 눈빛이었습니다.
우리의 연약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해주시는 눈빛이었습니다.
2) 그 눈빛은 이해의 눈빛이었습니다.
그래 이해한다. 내가 너의 연약함을 미리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이해하니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눈빛이었습니다.
3) 그 눈빛은 그 고통을 완전히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의 눈빛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곤욕을 당하고도 참고 있는 것은 너희들의 그 연약함을 위해서이다 그 연약함을 가지고도 하나님 나라에 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다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라고 하는 눈빛이었습니다.
4) 그 눈빛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엄청난 것을 주시는 사랑의 눈빛이었습니다.
사람이 누구나를 막론하고 세상에 살면서 한두 번 서너 번 아니 열댓 번이라도 죄를 범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마다 잊지 마시고 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눈빛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의 사랑을 받고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할머니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저를 나무라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할머니는 늘 저의 편이셨습니다. 제가 울 때나 보챌 때나 실수를 할 때나 언제나 애처로운 듯이 바라보시던 그 할머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 내가 안다. 다른 사람은 다 너를 이해하지 못해도 나는 너를 이해한다. 엄마 없이 자라는 그 슬픈 마음을 나는 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네 편이다. 내가 너를 도와줄 것이니 울지 마라. 우리 할머니의 주머니에는 늘 먹을 것과 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할머니 품이 어른이 된 지금도 그립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할머니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할머니의 눈빛보다 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 편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동정의 눈빛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눈빛으로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할머니가 줄 수 없는 엄청난 것을 주시려고, 우리 할머니도 대신할 수 없는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아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우리 형제자매들을 볼 때 이 동정의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바르게 살고 싶어도 바르게 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의 눈으로 보시듯이 우리도 서로 불쌍히 여기며 동정의 눈으로 보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베드로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세 가지의 질문을 드렸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고 사십니까?
제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신호를 잘 보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십니까?
제발 설교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그 동정의 눈빛을 보며 사십니까?
제발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잘 이해하시고 사랑하시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제발 제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나 대신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