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과 안식

 

 

 

히브리서 41~2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성도 여러분! 본문은 그러므로(ον)”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분명 지금까지 해 온 앞의 이야기에 대한 결론적 권면임을 의미합니다. 즉 사도가 과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행했던 그 불신앙의 모습과 그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왜 이야기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저 불신앙과 불순종의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가 과거의 사건을 통해 당시의 성도들과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두려워하라(φοβέω)”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두려워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사도 자신을 포함하는 권면입니다. 즉 성도들에게만 하는 권면이 아니라 자신도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앞 장에서 말한 것처럼 불순종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않도록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서신을 받는 교회의 현실이 과거 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사도가 우리에게 두려워하라고 하는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그 안식에 동참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두려워하라라고 권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권면합니다(10:26, 1:28, 2:10 ). 그런데 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두려워해야 하는 경우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경우의 기준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먼저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사는 사람입니다. 저들은 우리의 육에는 관여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영원한 생명과 우리가 영원히 누리를 안식에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위협이나 역경, 또는 대적들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때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믿음이 없이 불순종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해야 합니다(2:12). 그리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모습입니다(고전9:27).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서 아주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믿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복음과 믿음과 안식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안식에 대한 약속이 복음입니다.

 

 

본문 2절에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라고 했습니다.

 

 

먼저 사도는 우리에 대한 정의를 복음 전함을 받은 자(εηγγελισμένοι)”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우리는 복음 전도를 이미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복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이 단어가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 또는 기쁜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의 우리들에게나 복음은 이미 들려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백성들이 들은 복음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가나안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복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도들에게 이 죄악 세상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안식은 복음 중의 복음인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은 복음과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습니다.

 

 

본문 1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의 안식은 우리가 3장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안식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이요, 또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안식에 대한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남아있다(καταλειπομένης)”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남은 채로 놓아두었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는 활동과 관련되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었고, 오직 자기 한 사람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남겨두셨다고 할 때 사용된 표현이 바로 본문의 남아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약속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효력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늘의 우리들이 자주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습니다. 과거 저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안식에 대한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소식입니까?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 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로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저들의 실패와는 상관이 없이 그 약속이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그래서 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가나안의 약속, 안식의 약속이 복음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안식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안식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혹시 그가 너희 중에서 미치지 못하는 자로 판단하시지 않도록 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경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판단의 주체는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안식에 들어가기에 부족한 자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셨는데, 거기에 누가 대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하고 무오(無誤)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판단은 최종적입니다. 결단코 돌이키거나 변경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를 든다면 마태복음 2531절 이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나누십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형벌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염소의 편에 선 자들입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산 자들입니다. 신앙생활도 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저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심판하십니다. 이는 저들의 믿음과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 나라와 그 안식에 참여할 수 없는 자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믿음이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우리를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라고 하는 판단만 남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는다면 그 약속은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복음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그날을 소망합니다. 그 믿음과 소망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우리의 길이 험하고 고단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나갑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소망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어려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린다면, 소망이 흐려진다면 이 얼마나 위험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가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 앞에서 그 믿음을 인정받지 못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는 저 영원한 안식을 소망한다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로 판단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더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령께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입니다.

 

 

.믿음과 결부되지 않은 복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본문 2절에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저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은 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복음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이 복음은 그 자체적으로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서 1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단지 선포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복음을 듣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그 복음이 선포되고 들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 복음은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고, 아무리 많은 복음을 들었다고 해도 그 복음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복음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음은 우리가 반드시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가 들은 그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 복음은 그 어떤 죄인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복음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과거 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하지만 이 역사는 단지 역사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역사는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예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지금 비록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오늘의 성도들이 이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들은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나라, 하나님의 말씀을 근간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는 나라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은 그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이 주신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따라 삶으로 살아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창조주요, 구원자요,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믿음에 실패했습니다. 본문에서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았다라고 하는 표현은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그 복음이 저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저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표현인 순종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지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은 아주 객관적이고 실재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복음을 우리의 믿음과 결부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우리의 믿음으로 결부시킬 때, 비로소 그 복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비록 우리가 복음을 들었을 때, 이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는 많습니다. 마치 광야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면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저들을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 어떤 대적들을 만나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만 있었다면 저들은 능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 사도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2:18~19). 이는 단지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 끝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인도 아래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약속하신 기업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됩니다.

 

 

사람은 역사라고 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역사의 주인이며 그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은 시간과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합니다. 따라서 저 광야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사도시대에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했던 이스라엘을 대하셨던 하나님과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응하는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복음을 불신앙하고 불순종한 저 광야시대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의 안식을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 사도는 이를 강조하면서 흔들리는 믿음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절대적인 주권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반응에 따라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만약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라면 이미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보였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믿음이 없었고, 구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믿음을 순종의 삶으로 살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복음과 믿음, 이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 어느 하나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복음을 들은 자가 믿음으로 그 복음에 반응하고 순종으로 그 복음을 살아갈 때, 비로소 그 복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처럼 살아가게 합니다. 믿음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까? 나는 지금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복음을 내 삶 속에서 살아내고 있습니까? 아직 여기에 대해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고 몸부림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반드시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는 놀라운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나아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들이 우리에게 들려진 복음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함으로 인해 그 복음에 약속된 영원한 안식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