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2. 2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112)
본문 : 엡 6:14
제목 : 진리의 허리띠-이신칭의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우리 아동센터에 아이들이 보는 책이 많이 와서 제가 가끔 한 두 권을 빼서 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이들 책에는 거짓말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말을 하고 귀신이나 도깨비가 날아다니고 ...
아이들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고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 그렇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이 너무나 사실처럼 이야기를 해서우리 아이들이 혹 그런 것이 사실이라고 착각을 하거나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착각을 하고 사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신화나 단군신화나 사람이 만든 거짓말 이야기라는 알지만 사실처럼 착각을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역사라고 알고 있는 이야기들 중에도 사람이 만들어 낸 거짓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왕들 중에는 알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가야를 세운 김수로왕과 신라의 4대왕 석탈해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진 귀하고 신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스스로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거짓말들과 꾸며 낸 이야기들 때문에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을 사실처럼 알고 살게 됩니다.
더 불행한 것은 정작 알아야 할 진리가 왜곡되고 훼손되는 일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 여러 시간을 말씀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수많은 거짓들 속에서 살아감으로 인해서 우리가 바르게 알고 행해야 할 참된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바르게 아는 것 이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중요할 것이고 참된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영적인 문제는 더더욱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진리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이신득의(以信得義)혹은 이신득구(以信得救)라는 말로 쓰기도 합니다.
의롭다 칭함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얻거나 구원을 받는 것은 이신(以信)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의 핵심은 "이신칭의"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복음이 되는 것은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천국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천국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그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내 죄 대신 십자가에서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좋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함으로 도덕적인 수준에 이르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의의 기준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은 단지 그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나라가 사실이며 예수님께서 나 대신 죽어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사실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가 우리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지혜도 주시고 환경도 주시고 믿을 수 밖에 없도록 우리를 지도하시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웠다고 다 믿는 것도 아니고 못 배웠다고 못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이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시고 그것을 의의 기준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1.사람들이 정한 의의 기준
며칠 전에 저와 친하던 고등학교 동창 한 사람이 호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이 친구는 세상을 참 비교적 착실하게 살던 친구였습니다.
좋은 회사도 다녔고 남들에게 좋은 일도 했고 나름대로 인생을 바르게 산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안 다녔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목사니까 친구에게 늘 전도를 했습니다.
이 친구 하는 말이 나는 별로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고 그래도 나름대로 착하게 살았으니까 죽으면 좋은데 가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아직도 이 좋은 대한민국에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대부분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가면 나쁜 놈들이 많은데 나는 교회에 안 다녀도 착하니까 너희들 천국 갈 때 당연히 나도 천국이나 더 좋은 곳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어차피 호주에 가면 한국사람 만나기 위해서라도 교회를 가게 될 것인데 기회가 되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네가 네 스스로 세운 의의 기준을 가지고 네 스스로를 판단해서 선한 사람이니 의인이니 하지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라고 여기시는가를 알아보고 그 기준에 의해서 네가 죄인인지 의인인지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스스로 세운 의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무의식 속에 있는 의의 기준은 사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오랫동안 믿고 따르던 불교나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의라고 생각하는 그 기준은 불교가 정한 유교가 정한 의가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에 "사성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성제는 네 가지 진리를 말하고 불교 교리의 핵심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이 네 가지를 사성제라고 합니다.
물론 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교리가 이 사성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는 설명을 할 수가 없고 잘 모르지만 대강 이렇습니다.
고성제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생로병사는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집성제는 집착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고통은 욕심과 그 욕심에 집착하는 것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멸성제는 소멸을 의미합니다.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생태를 의미하며 이것을 해탈이나 열반이라고 합니다.
도성제는 이런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올바른 길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고행을 하고 스스로 수도를 함으로서 모든 고통이 사라진 상태에 도달하려는 것이 그들의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 속에도 있어서 교회 하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 기도를 많이 하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 마음의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을 의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좀 잘 살고 재미있게 살면 속물이다 경건하지 못하다라고 하는 사상은 이런 불교의 사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성도들도 좋은 차 타고 골프 치러 다니고 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성도는 재미있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우주 만물이 우리 아버지의 것이고 모든 참된 즐거움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목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화려하게 장식을 하도록 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출애굽기 28장에 하나님께서 제사장이 입을 옷을 제정해 주셨는데 
그 옷은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고 정금으로 보석으로 장식을 한 화려한 예복을 입도록 했습니다.

속세를 떠나고 고행을 하고 욕심을 버리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사는 것을 의로 여기는 것은 불교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의의 기준 중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유교는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입니다. 수기(修己)는 자기 자신의 도덕적 수양을 쌓는 것이며, 치인(治人)은 사람을 윤리와 도덕으로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교는 윤리의 학입니다.
도덕을 지킴으로 윤리를 지킴으로 바르게 행동함으로 서로의 사이에 행복을 지키면서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고 의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말씀에도 그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라는 교훈의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거나 의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2.구약성경에서 정한 의의 기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의 기준은 율법과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칙에 따라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이런 율법들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선한 사람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속은 악한 사람이 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다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실상 그 율법의 목적인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되어가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인간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짐승을 바라보면서 범죄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리려 오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이 아까워서 병든 것 저는 것으로 가져와 하나님께 드리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이웃의 것을 착취하고 이웃을 노엽게 했습니다.

자신들은 계명 몇 가지 지키고 의로운 사람이 다 된 것으로 착각을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 위선자요 가증스런 사람이 되고만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율법주의자들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계명 몇 가지 지키고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지키기나 하면 괜찮겠지만 좋아하는 것 잘 하는 것 형식적으로 몇몇 가지만 지키고 다 지키는 것처럼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그 율법을 다 잘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인간들이 그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다고 의인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훔치려는 마음 마음의 욕심까지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의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만 가져도 살인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를 바라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죄를 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끼리 비교하면 조금은 더 의롭게 보이기는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모두가 율법 앞에서는 죄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3.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신 새로운 의의 기준 
모든 사람들이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21-22절 말씀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도 율법 앞에서 의로워지지 못한 인간들에게 율법 외에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 말고 다른 한가지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도 죄인이라는 것을 약점으로 공격을 합니다.
우리의 죄들을 하나님 앞에 고자질하고 우리 자신도 그 죄 때문에 자책감을 가지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너같은 놈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느냐 이제 포기하고 차라리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좋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보고싶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려서 헤어진 가족들을 찾는 프로그램입니다.
가끔 아주 작은 잘못 때문에 집을 나가서 아주 엉뚱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떤 아이가 부엌에서 잠깐 실수로 그릇을 깨뜨립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인데 안되면 매 몇대 맞으면 될 것인데 겁을 먹고 집을 나가서 그 죄책감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고 고아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많은 죄악들이 생각이 나기 때문에 감히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유일한 무기가 되는 것이 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이 있으면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하는 강한 무기라는 것을 꼭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진리입니다.
그 성경말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진리입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이신칭의가 진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