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6.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엡종1)
본문 : 엡 1:3-6
제목 : 찬송하리로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는 보면서도 그것들이 한데 우거져서 이루어진 숲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부분적인 것만 볼 줄 알고 전체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행동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에베소서 강해설교를 들으면서 부분적인 것은 아주 정밀하게 자세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부분적인 것에 너무 치중을 하다가 전체적인 내용이나 중요한 핵심을 놓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시간 동안 에베소서의 전체적인 모습과 각 장별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번 기회에 부분적인 내용들에 심취되어 전체의 내용에 소홀했던 부분을 잘 정리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1장의 핵심적인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추구하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다소 다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핵심내용 세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 세 가지 핵심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찬송하리로다.
본문 3절에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신 말씀은 1장의 주제이자 에베소 전체의 주제이며 성경전체의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제일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기뻐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잊어버렸고 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격도 박탈당했습니다.
그 자격을 회복하고 원래의 삶의 목적인 찬양을 드리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목표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는 이 찬양에 관한 구절이 네 군데나 나와 있습니다.
3절에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6절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12절에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에도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들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공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찬송을 함에 있어서 어떻게 찬송해야 하는가는 의견이 분분할 줄 압니다.

왜 찬송하여야 하는가는 너무 많이 들으셔서 잘 아시리라 믿고 오늘은 어떻게 찬송을 할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은 찬송가에 있는 찬송으로 찬송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조사해서 예배에 부르기 합당하다고 만든 노래들이기 때문에 대부분 좋은 노래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음악은 크게 클래식 음악(고전음악)과 대중음악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대중음악은 우리 나라의 대중가요,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소네 미국의 팝송들이 대중음악에 속합니다. 

사람들이 생각을 하기를 클래식은 고상한 것이고 대중음악은 저질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음악이란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쉽게 움직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좋은 음악이지 옛날음악이라고 해서 다 좋은 음악은 아닙니다.

또 옛날음악 즉 클래식음악은 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음악이고 대중음악은 다 사탄의 음악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클래식 음악에도 사탄을 찬양하는 음악이 있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있었습니다. 
대중음악에도 사탄을 숭배하는 저질 음악이 있지만 하나님을 찬송하는 음악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클래식음악을 찬송가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어떤 음악이든지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쓰여지는 음악이면 선한 음악이고 사탄을 찬양하는 데 쓰여지는 음악은 악한 것이라고 분류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정서에 맞지 않는 노래로 감정이 없이 형식적인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가장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타락한 영국사회에 영적인 복음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힘차게 부를 수 있는 새 찬송이 많지 않은 것을 깨닫고 고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부르던 시편 찬송이 너무 느리고 형식적인데 불만이 있었습니다.

작사에 재질이 있었던 동생 찰스는 많은 찬송시를 작시를 했습니다.
그가 생전에 작사를 한 곡이 6,500여 곡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가사에다 붙일 곡이 없어서 당시에 널리 불려지던 민요나 세상적인 노래 술집에서 부르던 노래까지 사용해서 그 곡에다가 찬송가 가사를 붙여서 불렀다고 합니다.

그 멜로디가 세상에서 불려질 때는 사탄의 노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싣고 힘차게 불리어졌을 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악기들에 대해서도 오해가 많이 있습니다.
기타나 드럼이나 전자악기들이 세상에서 사용이 되던 악기라고 해서 교회 안에 들어와서 사용되는데 많은 반대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악기들이 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 온 악기들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교회의 거룩한 악기로 사용이 되고 있는 이 피아노도 사실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는 세상 오락을 위해서, 술집에서 사용하던 악기였습니다.

그리고 오르간도 처음부터 교회의 악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사형시킬 때 사용하던 악기라서 처음에 교회로 들어 올 때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고 합니다. 

구약시대의 비파나 수금이나 여러 악기들도 사실은 다 사탄의 음악에 쓰이던 도구들이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쓰였던 악기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떻게 사용이 되는가가 문제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이런 악기들이 사탄을 찬양한다면 나쁜 악기이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이는 악기라면 거룩한 악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처음부터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거룩한 백성이었습니까
하나님을 모를 때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지 못할 때 그 때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때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난 모태신앙이고 처음부터 깨끗한 의인이야 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윗같은 사람도 바울같은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모태에서부터 죄인이었고 지금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노래가 어떤 장르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악기가 과거에 어떻게 쓰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데 쓰여질 때 그것이 거룩한 음악이요 거룩한 악기요 거룩한 백성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임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찬송을 가장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음악이 거룩한 찬송가의 음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신령한 복
1장의 두 번째 핵심어는 역시 3절의 "신령한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받는 복을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신령한 복 즉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복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육신적인 복입니다.

육신적인 복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복이고 신령한 복은 특별한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만 받는 복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영적인 복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이 세상의 복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께서 창조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인간들이 발명을 했다고 하는 것들도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질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초로 세워 놓으신 자연의 법칙을 이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세상에서 육신적인 복을 받아서 행복하게 잘 살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육신에 속한 복도 받았고 덤으로 신령한 복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중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복은 노력으로 받는 것이고 신령한 복은 은혜로 받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복을 받는 비결들을 이미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복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에 의해서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열심히 노력하고 땀 흘려 일을 하고 지혜롭게 살 때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고 무조건적으로 주시고 은혜로 선물로 거저 주시는 복입니다.

사람들은 늘 거꾸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신령한 복을 받기 위해서 엄청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해서 쟁취하려고 합니다.
육신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조르고 노력없이 받아 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잘 살고 싶은 사람은 노력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칙을 잘 지키면서 열심히 씨를 뿌리시면 됩니다.
신령한 복은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복은 우리의 공로와 우리의 노력과 전혀 상관이 없이 창세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바르게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육신의 복과 신령한 복은 서로 반비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복도 100% 받고 신령한 복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성격상 다른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으로 복을 많이 받아서 부자로 권력자로 건강한 사람으로 사고 없이 잘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어하지 않고 천년 만년 이 세상에서 살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어렵고 조금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 때 신령한 복이 확실하게 나에게 다가오고 그것을 더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령한 복과 육신적인 복을 양자택일을 해야 되는 경우가 있으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신령한 복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복은 이 세상에 한정이 된 복이고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영원한 복이고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사랑을 주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보면 이 신령한 복이 얼마나 위대한 복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선 이 세상에서도 육신적인 복을 받아서 행복함을 누리는 것보다는 신령한 복을 받았음을 알고 이 세상을 사는 그 축복이 너무나 참된 평안을 주는 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복을 사모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으로 인해서 배신감을 느끼고 허무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항상 내편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이 항상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건강이라는 것도 항상 유지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피었다가 시드는 것처럼 우리 육신의 삶이 그렇게 시들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덤으로 받은 은혜로 받은 이 신령한 복은 영원한 복입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입니다.
가면 갈수록 새로워지는 복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불완전한 것이 없는 완벽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복이 신령한 복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만 특별하게 주신 복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에게 거저 주신 복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복입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이 신령한 복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 신령한 복을 받았음을 늘 기억하시고 이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하나님께 항상 영광의 찬송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3.지혜와 계시의 정신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핵심적인 용어를 찾으라고 한다면 17절에 있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14절까지 성경전체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말씀 즉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그 이유로 신령한 복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나서 15절부터는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문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라고 번역이 되어서 얼른 무슨 말인지 이해를 잘 못하실 것입니다. 
잘 이해하도록 해석을 하면 지혜로우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알 수 있는 지식을 가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만 하나님을 알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고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구원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성령님을 받아야 합니까
사실 이 질문은 너무나 어설픈 질문입니다.
성령님은 지혜의 성령님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도록 해 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성령님이냐고 되묻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른 용도로 성령님을 받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빠지지 말고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잘 알고 그리스도를 더욱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이 신령한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더 잘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경 말씀에 기록된 진리는 너무나 좋기 때문에 알면 알수록 가까이 하면 할수록 경험을 하면 할수록 엄청난 감동이 몰려옵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위대함 그 놀라운 그 엄청난 진리는 우리가 평생을 배우고 공부하고 경험을 해도 다 알 수 없는 오묘한 것입니다.

더 가까이 오시기 바랍니다. 더 많이 아시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체험들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밤낮으로 그 위대하심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뛰며 춤추며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며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하리로다, 신령한 복, 지혜와 계시의 정신 이 핵심적인 말씀을 이지 마시고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