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15.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경찬5)
본문 : 계 14:1-5
제목 : 십 사만 사천인의 노래 

요즘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많이 보고 컴퓨터를 많이 하기 때문에 눈이 다들 좋지 않습니다.
가까운 곳만 자꾸 보면 눈이 근시안으로 바뀌어서 먼 곳을 잘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이 너무나 재미있고 컴퓨터 하는 것이 너무 좋기 때문에 눈이 나빠진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빠지게 됩니다. 

현대인들의 삶에 있어서도 이런 근시안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이 너무 좋기 때문에 재미있는 세상만 바라보다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시력이 단축이 되어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까운 곳에 재미있는 일이 많으니까 거기에 빠져 들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넓게 보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시간만 생각하고 그저 나만 생각함으로 주의의 사람들이나 미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좀 불편하지만 안경을 끼면 그만이겠지만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지고 현실에만 급급하고 나 자신에만 급급한 사람의 미래는 안경을 끼어도 고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우리가 살았던 모습을 뒤돌아 볼 때가 올 터인데 그 때 후회하면서 한숨을 짖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기야 평생을 뒤돌아 볼 줄도 모르고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많으니까 그래도 뒤돌아보고 한숨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주변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만 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나 한 사람 기분 내려고 마신 술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술을 마시고 술기운에 아내를 구타하고 자녀를 구타하고 범죄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나 한 사람 기분 풀려고 지르는 고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옆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나 한 사람 기분 좋으려고 피우는 담배 때문에 아내가 자식이 나 자신이 불치의 병인 암에 걸리기도 하고 또 여러 질병들을 유발시켜서 고통을 당하게 합니다.

나 한 사람이 남편으로 혹은 아내로 혹은 자식으로 혹은 형제로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가족들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처럼 할 수 있을 때 먼 미래를 보고 또 넓게 보고 최선을 다해 사시기를 바랍니다.

나 한 사람 잘하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지금 이순간을 책임있게 살면 먼 훗날에 소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성도들은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려고 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위해서 이 세상의 삶보다는 영원한 나라의 삶을 준비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참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에 되어질 모습을 미리 보면서 현재의 우리의 삶을 정리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한이 본 모습은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시온산에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함께 십 사만 사천의 성도들이 서 있는데 
그들은 구원을 받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십 사만 사 천 그들은 누구인지, 그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요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가 부를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먼저 그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십 사만 사천인
본문 1절 말씀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라고 했습니다.

십 사만 사천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말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은 십 사만 사천명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로 이단들이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 사만 사천 명에 끼어야 구원을 받는 것이고 자기들에게 와야 그 숫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말을 처음 들으면 성경에 그 숫자가 나와 있으니까 그럴듯하고 그들에게 가야만 될 것 같아서 사람들이 잘 속아넘어갑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왕 예수님 믿을 바에 확실한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 후에 십 사만 사천명이 다 차면 이젠 그만 오라고 할까요
그 다음에는 할말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가대 모집한 것이고- 십 사만 사천명이 뭐했습니까 노래 불렀잖아요- 지금부터는 집사 모집합니다 성도 모집합니다 그러면 그만이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십 사만 사천이 실제의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인 숫자라고 해석합니다.
상징적으로 많은 숫자라고 이해하거나 하나님의 정해진 숫자를 만족시키는 완전한 숫자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자들은 십 사만 사천 인을 상징적인 숫자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몇 명인지는 잘 모르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수에 따라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숫자에서 특별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해진 숫자가 있고 제한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누구든지에는 어떤 제한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중심보다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동등하고 누구나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도 어느 특별한 개인의 구원이 아닌 모든 사람이 함께 구원을 받는 사회의 구원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구원도 천국도 별로 중요하게 취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이란 의미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만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상 제한적인 구원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야곱과 에서가 한 형제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늘 소수였고 특별한 사람들만 주님을 따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십 사만 사천 인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 십 사만 사천에 속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아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 믿음으로 교회에 오는가 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교회에 오고 싶어도 아무리 전도를 해도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 이렇게 교회에 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구원받은 사람 즉 십 사만 사천 명 중에 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가도 어떤 사람은 꼭 이단교회에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교회에 다닐 때는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다가 이단이 와서 즉 사탄이 와서 한두 마디 하면 혹 하고 빠져 버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와서 설교는 잘 안 듣고 신앙생활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이단에는 죽어도 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27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라고 다 십자가의 복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보다 오히려 이 세상의 축복을 더 중요한 것으로 말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이렇게 십자가의 복음만을 유난히 강조하는 교회에 오셨습니까
일부러 이런 교회에 다니겠다고 작정하고 찾아다니셨습니까 이런 교회 다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까
와 보니까 그런 교회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분명 구원을 받은 그 십사 만 사천 인이라는 숫자에 든 사람이 분명합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하나님께서 구원하려고 계획한 그 숫자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2.이마에 인 맞은 사람들
본문 1절 말씀에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십 사만 사천명의 이마를 보니까 어린양의 이름과 즉 예수님의 이름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도 십 사만 사천명이 등장을 하는데 그들은 인을 맞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처럼 이름으로 싸인을 했는지 우리가 쓰는 것 같은 도장을 찍었는지 잘 모르지만 이마에 표시가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이 이마에 받은 주님의 표는 우상에게 절하고 손이나 이마에 받는 짐승의 표와 대조가 되는 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표를 받고 사탄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탄의 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마에나 얼굴에나 손에나 인을 맞는 것 가지고도 여러 가지로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표를 받아 가지고 다니지는 않을까 그래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 세상을 살려고 하면 짐승의 표를 받아야 하는데 그 짐승의 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고 공공연하게 우상을 섬겨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큰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 바코드가 나올 때 사람들은 아 때가 왔다 이것이 그 짐승의 표구나 라고 겁을 먹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용카드를 만들거나 현금카드나 이런 전자칩이 있는 카드들을 만들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로 이마에나 손에나 전자칩을 심어서 신분을 구별하는 시대가 올 것이고 그것이 짐승의 표가 될 것이 아닌가라고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승의 표나 하나님의 싸인도 다 상징적인 것이지 정말로 우리가 우려하는 그런 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정적인 말에서도 우리가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표를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창세 전에 미리 예정을 하시고 선택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흔적을 남겨 두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싸인이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표시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특별한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으로도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이 있습니다.
제일 쉬운 것이 무엇입니까 손에 가지고 있는 지문입니다.
유전자는 일란성 쌍둥이는 같지만 지문은 일란성 쌍둥이라고 해도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고유한 특성을 가진 눈동자 바깥의 홍채가 있구요 목소리도 비슷한 것 같지만 사람마다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만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이 독특한 표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 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표시를 해 두셨을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식별 할 수 없지만 주님만이 아시는 표시가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얼굴들을 많이 고치니까 사람들이 농담으로 하나님께서 못 알아보시면 어쩌려고 고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주 뚜렷한 표시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6: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여기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라고 하는데 이 말은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불도장을 찍어 표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자기 몸에 흔적이 있다고 한 것은 실지로 하나님께서 불도장을 그 몸에 찍어 주셨거나 어떤 눈에 보이는 표시를 해 주셨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당한 육체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표시를 그가 몸에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런 상처가 아니더라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특별한 표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주님과 함께 시온산에 서있는 사람
앞서 인용한 1절 말씀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시온산에 서 계셨고 그와 함께 성도들이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시온산도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앞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 펼쳐질 그 새 나라를 시온산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 미래에 어디에 서 있는가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공을 하고, 보람된 일을 하고, 칭찬받을 일 많이 해서 상을 받고, 파티를 하고, 기쁨이 넘치는 그런 자리에 앉고 싶습니까
실패를 하고, 남들에게 못할 일을 하고, 죄를 짓고,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슬픈 눈물을 흘리는 자리에 있고 싶습니까

인생 길은 한번 밖에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잘 못 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 한번 술에 중독이 되면 거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담배를 배우게 되면 그 담배를 끊는 일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어쩌다 마약에 중독이 되고 나면 평생을 폐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쩌다 도박에 중독이 되면 모든 재산을 다 잃을 때까지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물론 신앙의 힘으로 새 사람이 된 사람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잘못된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실패의 자리 좌절의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마음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세상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는 참으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시온에 설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그 때 그 시온에 서지 못해서 슬퍼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요즘 잘 보는 개그 프로그램 가운데 "누나"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젊은 두 사람이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자세히 듣습니다.
그러다가 뭘 잘 못하면 냅다 때립니다.
그러면 맞은 사람이 "누구신데 때리는 거에요"라고 항의를 하면 그 사람이 웃으면서 "누나"라고 대답을 하면서 춤을 추는 그런 코너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어려움을 당할 때 고통을 당할 때 하늘을 향하여 누구신데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드는 것입니까라고 항의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 때 나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면서 날 사랑하신다고 하면서 왜 그러시는 거에요라고 항의해 보십시오
너를 이 시온산에 데려오기 위해서다 
네가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이 시온산으로 오는 길로 오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너를 훈련시키고 고통당하게 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시온산에서 기쁨의 노래 승리의 노래를 부를 성도들입니다.
십 사만 사천이라는 그 상징적인 수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님의 인침을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미래를 바라보면서
그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고난을 기쁨으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좀 더 멀리 좀더 넓게 세상을 보시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